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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법과 언론

부자지간, 생물학적 관계 < 사회정서적 유대

판결을 보면 시대 변화가 보입니다. 법을 만드는 것도 사람이고, 법에 따라 판결하는 것도 사람이기 때문에 시대와 동떨어진 결정이 내려지긴 어렵죠. 물론 더디게 변화하는 듯 느껴질 때가 많지만 긴 흐름에서 보면 분명 변화가 반영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간통죄만 하더라도 1990년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첫 번째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나온 뒤 1993년, 2001년, 2008년 세 차례 더 합헌 판단이 나오다가 2015년이 돼서야 위헌 결정이 났죠.

 

특히 부부나 부모 자식 간 가족관계를 둘러싼 판결 흐름을 보면 과거 중시됐던 ‘전통적 가족관’이 많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죠. 해외 판례 동향을 소개하는 헌법재판연구원이 오랜만에 판례 업데이트를 했네요. 벨기에 헌재 결정을 소개할까 합니다.

 

 

생물학적 아버지보다 유대 관계를 맺은 아버지가 더 중요하다는 취지의 벨기에 헌재 결정입니다. 새로운 부자 관계 인정을 받기 위해 자녀가 생물학적 아버지를 상대로 ‘부자 관계에 대한 이의(異議)의 소’를 제기할 길이 원천 차단돼 있었지만, 벨기에 헌재는 관련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며 아동의 이익을 고려하는 판결을 했습니다.

 

2002년 3월 태어난 E는 어머니 M이 B와 재혼하면서 친부인 W와 오래전부터 연락을 끊고 지냈습니다. E는 최근 새 아버지 B와 감정적으로 긴밀한 관계라며 새로운 부자 관계 인정을 받기 위해 친부 W에 대해 부자 관계에 대한 이의의 소를 제기했습니다. 하지만 민법에 가로막혀 소송 자체가 각하될 수밖에 없게 됐죠.

 

벨기에 민법 제330조 제1항은 친자관계 지위에 있는 자녀가 부자 관계에 대한 이의의 소를 제기할 수 없도록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부자 관계에 대한 이의의 소가 제한 없이 행사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방지하자는 취지의 법이었죠.

 

그러나 E는 사회·정서적 관계가 없음에도 어린 시절 몇 년 함께 살았다는 이유로 소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녀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유럽인권협약 8조와 결합한 헌법 22조에 위반된다고 헌재에 위헌 심판을 청구했습니다.

 

△유럽인권협약 제8조(사생활 및 가족생활을 존중받을 권리)
1. 모든 사람은 그의 사생활, 가족생활, 주거 및 통신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2. 법률에 규정되고, 국가안보, 공공의 안전 또는 국가의 경제적 복리, 질서유지와 범죄의 방지, 보건 및 도덕의 보호, 또는 다른 사람의 권리 및 자유를 보호하기 위하여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이 권리의 행사에 대하여는 어떠한 공공당국의 개입도 있어서는 아니 된다.
△헌법 제22조
모든 사람은 법률로 정한 경우 및 상황을 제외하고 개인 및 가족생활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법률, 연방법률 또는 제134조의 규정은 이 권리의 보호를 보장한다.

 

벨기에 헌재는 E의 손을 들어줍니다. 헌재는 친자관계 확인 절차는 개인 정체성의 중요한 측면을 포함하기 때문에 E의 사생활과 관련되고, 따라서 문제가 되는 부자 관계에 대한 이의의 소는 헌법 제22조와 유럽인권협약 제8조의 보호범위 내에 속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소송이 제한 없이 행사될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동의 이익,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관계에서 가정의 평화와 법적 안정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봤죠.

 

헌재는 "부자 관계를 생물학적 사실보다 사회·정서적 현실을 중시한 것은 적절하다"며 이 소송을 각하하는 것은 아동이 친자관계를 확인할 가능성을 전적으로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럽인권협약과 헌법에 어긋난다고 봤습니다.

 

전통적 가족관보다 현재의 유대관계를 더 인정하는 판결이라 할 수 있죠. 막장 드라마를 보면 '출생의 비밀'이 단골 주제로 나오는데요. 이렇게 법이 생물학적 관계보다 사회·정서적 유대를 중시하는 추세로 간다면 출생의 비밀을 드라마에서 다루기가 좀 민망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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