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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틈날 때 남기는 유서

미리 쓰는 유서 3 - 이 글을 쓰는 솔직한 심정

아빤 오늘 어떤 거만한 느낌의 사람이랑 그리 유쾌하지 않은 점심을 했고, 오후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뒤 헬스장에 있었단다. 스트레칭을 막 마치고 배 주변에 들러붙은 녀석들과의 한판 대결에 들어갈 무렵, 처가에 내려가서 잘 놀던 네(첫째)가 넘어져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엄마가 상황이 한바탕 종료되고 안정을 찾은 후 아빠에게 덤덤한 메시지로 알려줬지만, 순간 아빠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단다.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선을 찍혀서 피를 흘렸던 이야기, 놀라고 당황했을 순간, 바로 병원으로 옮겨 상처를 꿰맨 이야기 등을 엄마에게 전해 듣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눈이라도 다쳤으면 어쩔 뻔했나, 코를 부딪쳤다면 부러졌을 수도 있는데, 또 한 번 가슴이 쿵 내려 앉더구나. 그만하길 참 다행이란 생각에 안도했지.

 

 

엄마와 이야길 마치고, 너를 바꿔달라고 했을 때 우리 둘 간에 나눴던 대화를 너는 기억 못 하겠지만 아빤 언제라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여섯 살인 네가 "다쳐서 피 났어요", "병원에 다녀왔어요"라고 울지도 않고 또박또박 의젓하게 말하는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아빤 안도할 수 있었단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는 차 안에서, ‘미리 쓰는 유서’를 괜히 쓰기 시작했나 싶었다. 작은 상처에도 이리 아파하는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전제로 아빠 마음대로 써내려간 이 글이 너무 무책임하지는 않은지, 그날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하늘의 부름을 받는 날이 생각보다 빠를 경우 어쩌면 이 글은 너희들에게 상처로 다가갈 수도 있겠다 싶더구나.

유서를 쓰면서도 ‘미리 쓰는 유서’가 언젠가 너희들이 아빠를 놀리면서 "아빤 왜 이런 주책을 떠는 글을 썼어"라고 말하는 날이 오길 기도한단다. 너희들이 어떤 형태로든 이 글을 볼 때 아빠는 간데없고, 너희들만 볼 수 있는 ‘진짜 유서’가 되지 않길 간절히 희망한단다. 적어도 너희들이 시집 장가갈 때까진 말이지.

 

이번 글은 아빠의 솔직한 마음이란다. 돌아갈 본향(本鄕)이 있음을 알기에 죽음 자체는 두려움이 아닐 수 있지만, 죽음을 통한 너희들과의 이별은 두려움으로 다가오는구나. 그것이 이 땅에서만큼은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에. 죽음 자체가 주는 두려움은 혼자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다 해도,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이들과의 단절이 주는 두려움은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단다.

 

오늘은 아빠가 네 이마의 상처로, 괜히 감상에 빠진 날이란 것을 이해해주길 바라. 아프지 말고. ‘애들은 다치면서 크는 거지’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한 것도 후회가 되는구나.

내일이나 모레 너희들을 볼 것을 기대했지만, 상처 치료로 하루 이틀 더 있다 와야 한단 말을 엄마에게 들었단다. 다른 이유였다면 너희들을 간절히 보고 싶은 마음에도 하루 이틀 더 주어질 자유시간에 기뻤을지 모르지만, 이런 이유에서라면 그리 반갑지 않구나. 어서 치료 마치고, 곧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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