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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틈날 때 남기는 유서

만날 때 헤어짐을 생각하는 것에 대해

<미리 쓰는 유서> 4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지 닷새째 만에 서울로 돌아온 날. 처음 내려왔을 땐 너희들이 몇 달 만에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 안기는 데 시간이 걸리나 싶었는데 서울로 다시 떠날 날이 되자 거침없이 품에 달려드는 모습을 보니 한껏 정이 든 것 같네. 헤어짐의 아쉬움이 어느 때보다 컸으리라 생각해.


오늘의 작별을 보며 시작과 끝, 만남과 헤어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단다.


연휴나 휴가가 시작될 때 주어진 하루하루에 집중하고 후회 없이 보내는 게 중요하지, 미리 끝날 날을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단다. 어차피 연휴의 마지막 날이 다가올 것을 안다고 해서 순간순간을 소홀히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 만남도 마찬가지. 만남 뒤에 필연적으로 오게 되는 헤어짐의 충격을 미리 염려해서 만남을 소홀히 해선 곤란하다 생각해. 만남이 깊을수록 헤어짐의 공허함, 상실감이 큰 것은 당연한 이치. 그게 두려워 만남을 소홀히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만남이라면 겉도는 관계에 그쳐 버리진 않을까.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아빠 엄마의 관계를 예로 들어 보면 가끔 티격태격할 수는 있어도 세상 누구보다 깊은 관계라 할 수 있지! 만남이 깊어져 결혼했고 그 결실로 너희 둘을 낳았으니 말이야. 이 만남도 언젠가 이생에서 작별의 때가 올 거란 걸 아빠 엄마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단다. 그렇다면 아빠 엄마가 헤어짐이 두려워 만남에 소홀했다면 어땠을까. 결혼은커녕 너희들도 태어나기 어려웠겠지. 아빠 엄마를 넘어 너희들과의 관계도 이와 같지. 언젠가 있을 너희들과의 작별, 거기서 오는 슬픔이 두려워, 최소한의 생존에 얽힌 의식주 관계만 맺게 된다면 어떨까. 너희들이 좋아하는 표범 놀이나 인형 놀이, 숨바꼭질 등은 하면 할수록 정이 쌓이고 이별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기 때문에 아마도 할 수 없겠지. 함께 살면서도 생존만을 위한 남남 관계와 같다면 언젠가 다가올 헤어짐의 아픔은 덜할 수 있겠지. 그러나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니.


베개와 이불로 만든 산에서 한참을 구르고 뒤엎고 숨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마도 너희들이 5일 동안 헤집어 놓은 방을 보며 얼마간 공허함을 느끼실지 몰라. 연휴가 길수록, 만남의 깊이가 더할수록 여운도 오래 가는 법이란다. 너희들을 돌보느라 미처 갖지 못했던 자유시간을 맘껏 누릴 수는 있겠지만 어쩌면 오늘내일, 아니면 이번 한 주 동안은 두 분이 후유증에 시달리실 게 분명해.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후유증이 두렵다고 해서 너희들이 고향에 내려오는 걸 막지 않으신단다. 헤어질 때의 울적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희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아시니까. 아빠나 엄마도 마찬가지. 너희들과 만남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또 오래가길 바라.


만남의 깊이와 헤어짐의 슬픔은 비례한단다. 잠시 작별이 아닌 죽음을 통한 영원한 헤어짐이라면 무엇으로 위로가 될까.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넘어 오열하는 순간이 올 테고,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이 찾아오겠지. 가슴에 묻어도 묻을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할 지 몰라. 슬픔에 담긴 끝없는 감정의 심층을, 몇 가지 단어로 설명하는 게 애초 무리일 수 있겠지. 그렇다 해도 누구에게나 목메어 울고 울어 다시 눈물을 쏟을 만한 기운조차 나지 않을 때 냉정의 시간은 한두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란다. 그때 함께 했던 추억을 떠올려보면 어떨까. 우리의 만남을 통해 받았던 그 사랑은 너희들, 또 아빠 엄마의 가슴과 생각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단다.


아빠는 오늘 서울에 올라와 짐을 풀고, 며칠 간 비워둔 집에 쌓인 먼지를 닦아 내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내일 출근을 대비해, 잠시 일 하러 나왔단다. 어느 때보다 연휴를 되돌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담담히 받아들이기로 했지. 지금 이 순간이든 어떤 일이 닥치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해마다, 절기마다 반복되는 연휴와 휴가를 통해 어쩌면 인생에서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연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맞이하는 이 작은 마지막은, 다음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 이번 설 연휴를 보내는 서운함을, 다음에 다가올 휴가 혹은 추석을 기대하며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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