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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시사스러운

'태극기가 이념에 펄럭입니다. 하늘높이 우울하게~'

 사회 초년생 시절,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알람으로 설정한 적이 있다. 좀 더 상쾌하게 기상할 수 있을 것 같았서였다. 그러잖아도 사회에 첫발을 떼면서 바짝 긴장한 상태인데 출근도 이른 시각 해야 해서, 효과적으로 일어나기 위한 나름의 방편이었다.


 결과는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였다. 단잠을 깨면서 밀려오는 약간의 짜증을 덜어내는 효과를 봤다는 점에선 성공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하던 그 노래가 싫어졌다. 거부감이 들었다. 좋아하던 노래 하나를 잃었다는 점에서 성공보단 실패였다. 노래는 그대로인데 그 노래에 대한 내 인식은 ‘내 단잠을 깨우는 나쁜 녀석’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반복 효과의 저력이다. 요즘도 길을 가다 그 노래가 나오면 왠지 그때가 생각난다. 밀려드는 거부감은 어쩔 수 없다.


 문득 알람에 설정했던 노래가 생각난 이유는 오늘 아침 신문을 보면서 눈에 들어온 기사 때문이다. 조간은 죄다 1면에 어제 있었던 탄핵 찬반 집회 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 중 태극기를 사용하는 보수 진영의 집회가 눈에 띄었다. 탄핵 반대 집회에 나온 참가자들이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어느덧 내 머릿속에는 ‘태극기=00탄핵 반대 집회에 나온 보수 성향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기 시작했다. 반복 효과가 무섭다는 걸 깨달은 두 번째 순간이다.



 이 효과는 생각보다 깊숙이 내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나 보다. 어제 아이들과 산책하다 삼일절을 맞아 아파트에 게양된 태극기를 보게 됐다. 생각보다 태극기를 내건 집이 많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적을 때가 있었나 싶었다. 또 나도 모르게 ‘저 태극기를 내건 집은 혹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성향의 사람이 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가치 중립적으로 생각했던 태극기가 이제는 이념과 탄핵 찬반을 가르는 잣대로 인식되고 있었다. 실제 태극기를 게양하려다 이 같은 이유로 뜻을 접은 사람이 꽤 있었나 보다. 


관련기사  - 3·1절인데…태극기 게양 '머뭇'


 문제다. 태극기는 국가 상징 중 하나로 보수가 정권을 잡든 진보가 잡든 사용해야만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도 태극기를 그리면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아이들이 태극기를 그리며 ‘왜 특정 이념의 상징인 태극기를 그려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면 큰일이다.


 누군가는 같은 이유를 들면서 촛불집회에서 사용하는 ‘초’를 두고 시비를 걸지 모른다. 박 대통령 지지자라면 초만 봐도 두드러기가 일어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초는 싫으면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알람으로 설정한 노래가 싫으면 안 들으면 그만인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노래를 들으면 된다. 굳이 그 노래를 고집할 이유는 없다. 태극기와는 다르다.


  초는 또 용도가 분명해서 아무리 반복 사용한다 한들 상징물로 자리잡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집에 전기가 나갔을 때 초를 켠다고 해서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사람으로 생각지는 않는다. 생일잔치에 초를 꽂는다고, 연인이 데이트 용도로 초를 밝힌다고 누가 특정 이념에 편향된 인사로 생각하겠나. 종교의식에서도 초는 흔히 사용된다.


  현 추세로 보면 3월 초순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정이 나오면, 결과가 어떠하든 태극기가 더 펄럭일 것으로 보인다. 인용이면 분노의 태극기, 기각이면 환희의 태극기로 성격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지금이라도 태극기의 오남용을 중단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처럼 진짜 애국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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