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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20년 만에 다시 마주한 '8월의 크리스마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본 건 개봉했을 때였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98년, 고등학생일 때다. 당대 최고 스타였던 심은하가 나온다고 해서 남고에 있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갔고, 나도 자연스레 동참했다.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걸 보고, 함께 갔던 친구들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뭐야, 아직 본론도 안 들어간 거 같은데 벌써 끝났어?"

허무했다. 화끈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물 간의 극대화된 갈등도 볼 수 없었다. 고등학생이라면 마땅히 기대했던 야한 장면은 물론 없었다. 뭔가 나올법하다가 영화가 그냥 끝나버린 느낌.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싶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지금도 장면과 줄거리가 생각난다. 20년이 지났는데, 난 그 뒤로 재방송이든 뭐든 다시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잔잔하게, 그렇게 내 가슴에 남아 있었던 셈이다. 한석규가 생을 향한, 심은하를 향한 애끓는 간절함을 시원하게 표출하고 말았다면, 이리 오래도록 남아 있진 않았을 거다. 그의 마지막 역시 덤덤하게 보여줬고, 감동을 짜내려는 억지가 없었다.

이 20년 동안, 참 많은 영화를 봤다.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영화가 상당했다. 중고등학교 땐 주말이 되면 비디오 3~4편을 빌려 밤새 봤던 적도 있다. 성인이 되고 스마트한 세상이 와서, 비디오보다 PC 다운로드나 TV로 다시보기 서비스 등으로 마음만 먹으면 영화 몇 편씩 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수많은 영화 중엔 줄거리는 고사하고 제목조차 생각나지 않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또 볼 때는 사이다였지만, 돌아서면 사이다 거품이 증발하듯 그렇게 사라져버린 영화가 있다.

기억 속에 은근히 저장돼 있던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린 계기가 된 건 어제 다시 봤던 ‘미술관 옆 동물원’ 때문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걸려들었다. 이 영화도 1998년 개봉됐었다. 마찬가지로 잔잔하게, 스며들듯, 그렇게 와 닿았다. 쥐어 짜내는듯한 감동이나 극적인 장면이 없어서 오히려 좋았다. 여운이 묻어났다.

요즘 한국영화가 참 많이 쏟아지는데 이런 영화가 생각보다 없다. 흥행하는 한국영화는 꽤 챙겨보는 편인데 이런 부류의 영화가 흥행하지 않아서 내가 놓친 것일까, 아니면 자극적이고 화끈한 소재가 아닌 영화는 잘 만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요즘 복고가 유행하는 건 단순히 옛것에 대한 그리움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 같다. 영화만 하더라도 요즘 사람들이 갈망하는 무언가를 요즘 영화보다 옛 영화가 더 잘 대변해 주는 측면이 있어서가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다운받았다. 20년 만에 이 영화를 다시 마주한다. 궁금하다. 2017년 8월의 크리스마스는 어떤 영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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