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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책책책

최인훈의 광장(문학과 지성사, 2010)

최인훈의 광장(문학과 지성사, 2010)


-총평

과거 최인훈의 광장을 읽었을 때는 남, 북, 제3국이라는 광장에 주목했다. 이번에는 좀 다르다. 생의 의미나 본질을 갈망하는 주인공의 고뇌가 광장의 의미보다는 더 다가왔다. 어느 광장에 속한다 한들 과연 채워질 수 있을 것인가. 주인공이 진정 원하는 광장은 과연 존재할까. 인간성이 말살되는 좌우 대결 속에서 한 개인을 버티게 하는 힘은 광장보다는 밀실에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대화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아닐지.


-밀실과 광장

이 소설에서 밀실은 어디일까. 이명준이 아비 월북 후 얹혀사는 집. 윤애가 사는 인천 집, 아비로 인해 끌려가서 얻어맞은 취조실, 배 안의 선실, 월북 이후 찾아간 아비 집, 이후 아비 집에서 뛰쳐나온 하숙 집, 낙동강 전투에서의 작은 굴이 아닐지. 

그렇다면 광장은? 크게 보면 남한, 북한, 제3국.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갑판 위. 영미가 파티에서 이명준을 불러냈던 사람들이 떠들썩하던 그곳. 


-밀실과 광장의 매개체이자 주인공을 광장에서 버틸 수 있게 했던 힘

남한에선 윤애(아비 친구 집에서 살던 영미도 나름의 역할), 북한에선 은혜. 이들은 배신, 사랑, 재회, 굴복 등 다양한 성향을 지녔다. 이 둘이 사라졌을 때(윤애와의 단절, 은혜의 사망) 이명준을 광장으로 이끌어주는 매개체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지. 


-그들만의 광장

광장은 광장이지만, 배타적 광장이 아닐까? 광장이 배타적이라는 모순. 일관성을 강요하는 곳이 광장인가. 광장이 다양성이 어우러지는 공간이 아닌 이상 배타적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다. 광화문에서도 두 광장에 나뉜 촛불과 태극기?

광장에 종속된 인간들 개개인의 다양성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인간이 모인 곳이 광장이 아니라면, 그들만의 광장에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내쫓는 곳이 광장이라면 그건 광장이 아닌 집단의 횡포


-책 곳곳에 나타나는 단어들. ‘매듭’, ‘맺음말’

남, 북, 제3국으로 향하는 배 안 어디서도 제대로 된 매듭을 짓거나 맺음말을 제대로 남기지 못하는 주인공. 매듭과 맺음말에 대한 갈망은 책 마지막이 돼서 극단적 선택으로 비로소 실현된 것인가


-‘몸의 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

인간의 의지와 이성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단어가 아닐지. 몸의 길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은 사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드는가. 고문을 당하던 주인공이 나중에는 고문하면서 이성보다는 몸의 길을 따라 움직인다. 그를 괴물로 만든 사회.

“이성은 정념의 노예”라고 했던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이 행동하게 하는 근본적인 동기는 이성보다는 정념에서 나온다고 했으니. 이성이 몸의 길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개인의 의지가 부족해서인가, 임계치를 넘어선 괴물 사회의 영향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