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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내가 만난 구두닦이

내가 만난 구두닦이

 

점심 약속이 여의도역 쪽이었다. 모처럼 미세먼지가 없는 날, 걷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조금 서둘러 나가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생각보다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했다. 먼저 들어가자니 시간이 뜨고, 밖에서 서성이자니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구두나 닦자’.

 

직장인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라 쉽게 구두수선점을 찾을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한두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자, 구두약 냄새가 확 밀려온다. 구두닦이 아저씨는 젊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 수선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구두 닦으시게요?”라고 하면서 아저씨는 미리 준비된 쇼핑백에 구두를 넣고는, 오른쪽에 있는 작은 창을 열더니 걸이에 걸었다.

미리 결제를 했으면 이 공간에 들어올 필요 없이 저기서 가져가라는 뜻인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내 구두도 아닌데 뭘.

 

아저씨에게 구두를 맡기고 의자 앞에 놓여 있던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사실 웬만해선 구두닦이를 찾지 않는 편이다. 집에서 쓱쓱 싹싹 문지르고 나오면 되는데 4000원이나 되는 거금을 들일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렇지만 봄도 되고, 날도 좋고, 구두를 닦으면 기분이 좋을 날씨였다. 구두에 사치 한번 하자 싶었다. 

 

아저씨는 내가 들어오기 전에 커피포트에 물을 올려 놓았었나 보다. 어느덧 팔팔 끓던 물이 100도를 넘겼는지 스위치가 꺼졌다.

 

저기 컵 있으니 한잔 타 먹어요

, 아뇨. 괜찮습니다

하긴, 요즘 젊은 사람은 저처럼 싼 커피 안 먹죠? 비싼 커피 먹죠?”

, 아뇨. 믹스도 잘 먹어요. 커피 생각이 별로 없어서요.”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시 열심히 닦으신다. 구두약을 맨손가락에 척척 묻혀서 구두에 맨질하게 닦으신다. 예전엔 구두닦이 아저씨들이 굳이 맨손에 약을 묻히는 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구두솔이나 천으로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하지만 최근 어떤 구두닦이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구두가 가죽이기에 가죽인 맨손으로 문질러야만 가죽 사이사이의 빈공간에 구두약이 잘 스며든단다. 집에서와 달리 4000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닦을 때 광택의 차이가 나타나는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 노하우와 비밀이 있기에 구두닦이는 맨손을 상해가면서까지 저렇게 열심으로 구두약을 손에 묻히는 것이다. 작은 차이가 아니다. 자신을 던져서 일하는 분들의 손을 거친 구두와 그저 시늉만 한 구두의 광택이 같을 수가 없다. 

 

적당히 발라서는 성에 차지 않나 보다. 구두약을 머금은 아저씨의 손은 노련한 손놀림과 함께 슉슉, 샥샥 오간다. 힘주어 닦는다는 건 이런 걸 보고 하는 말이다.

 

5~10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정이라는 단어가 오랜만에 떠올랐다. 4000원을 내고 나왔는데, 괜히 마음이 요상하다. ‘싼 커피, 비싼 커피…’가 머리에 맴돈다. 저분처럼 저렇게 내 일, 내 직업에 온 정성을 기울였던 게 언제였던가.

 

그날 점약을 마치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벅에서 제일 싼 4100원짜리 아메리카노를 먹는데, 별맛이 느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