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법과 언론

유죄와 무죄 사이 ‘not guilty’를 허하라

낭만브라더 2015. 11. 24. 15:16


'이태원 살인사건'을 소재로 2009년 개봉한 영화(http://goo.gl/qZ0gDy)


유죄와 무죄 사이 ‘not guilty’를 허하라


 우리나라 사법체계에서는 형사사건 피고인에게 재판부가 선고를 내릴 때 유죄(有罪) 아니면 무죄(無罪)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유죄는 잘못이나 죄가 있다는 의미로 범죄 혐의가 증명됐다는 뜻, 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은 없다.

 

 문제는 무죄에 있다. 영어로는 innocence, 즉 결백하고 아무런 죄가 없다는 의미다. 과연 모든 형사사건이 그럴까. 재판을 보다 보면 재판부가 선고를 내리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공소사실이 합리적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에 부족하다", 다시 말해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의심은 가지만, 검찰이 제시한 증거나 기록만으로는 이런 의심이 깨끗하게 해소될 정도는 아니라는 의미다. 애꿎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원은 이럴 때 대체로 무죄를 선고한다.

 

 엄격히 따지면 무죄라기보다는 ‘유죄가 아니다’, 다시 말해 not guilty에 가깝다. 유죄가 증명되지 않아 무죄가 선고됐음에도 몇몇 피고인들은 마치 자신의 결백이 씻어진 것처럼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적반하장 식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례도 있다. 몇몇 법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었다. "누가 봐도 저 사람이 범인이다 싶은 느낌이 들지만,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죄를 선고해야 할 때가 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사람 중에 무죄가 선고되면 꼭 자신이 투사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라도 유죄와 무죄 사이에 not guilty 단계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는 배심원들이 평결에서 guilty냐 not guilty냐를 판단한다. 사실 그 사람이 결백하다는 의미의 무죄는 신만이 알 일이다. 죄가 성립되는지(guilty) 아니면 죄가 성립되지 않는지(not guilty)를 사람이 판단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유죄-not guilty-무죄' 3단계로 선고를 할 경우 반발은 있을 수 있다. 결백을 호소하는 사람이 무죄가 아닌 not guilty를 받는다면 누가 기분이 좋겠나. 대안은 있다. not guilty를 기본으로 삼으면 된다. 현행 대부분의 무죄 선고를 not guilty로 하고 정말 무죄가 명백히 증명된 경우, 예를 들어 진범이 밝혀졌다든지 DNA 검사나 국과수 분석(이것 역시 완벽한 진실은 아닐 수 있지만)을 통해 제시된 증거와 배치되는 다른 결과가 나온 경우 등 과학적으로 입증된 경우에는 무죄를 선고하면 된다. 비율로 따지면 not guilty가 대부분이고, 무죄는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 재판이 16년 만에 다시 진행되고 있다. 여러 증거가 진범으로 패터슨을 지목하고 있다 해도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사실 알기 어렵다. 16년 전 사건을 합리적 의심 없이 재증명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크지만, 패터슨에게 무죄가 선고된다면 과연 그 무죄를 법감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칼에 무참히 살해당한 사람은 있는데 현장에 있었던 패터슨과 에드워드 리 둘 다 무죄, 즉 '결백하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다시금 무죄가 선고되지 않길 바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죄가 선고된다면 적어도 결백하지는 않다는 걸 법이 보여줘야 하기에 not guilty는 그래서 더 허용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모든 걸 떠나서 이번에는 제발 검찰이 16년 전 과오를 딛고 제대로 증명을 해 줬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