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보다 계곡을 찾는 사람들
평상을 5만원에 대여했다. 몇 시간 있지도 않았는데 아깝기는 했지만...
10대 정도의 평상에 이날 낮 이용객은 우리 가족이 유일했다.
휴가 둘째 날에는 바닷가를 갔고, 셋째 날에는 계곡을 찾았다. 바닷가를 간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나야 바닷가에서 태어나고 바다를 오래 접했지만, 우리 아이들에겐 바다가 생소했다. 바다와의 만남을 선물해줄 필요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찾은 바다는 내가 어릴 적 생각하던 그 바다가 아니었다. 아니, 바다는 그대로였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아무리 평일이라 해도 어린 시절 휴가철만 되면 시끌벅적했던 그 바다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썰렁하지?’
사람은 몇 안 되는 바다였지만 꿋꿋하게 우린 평상을 하나 대여했다. 폭염 땡볕 아래서 우리는 튜브를 탔고, 모래 놀이를 했다. 삼겹살을 구워 먹고, 라면을 끓여 밥도 말아 먹었다. 그렇게라도 다녀오니 다섯 살 된 아이가 바닷물이 짠 것을 알게 됐고, 파도가 치면 튜브를 탈 땐 재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하지만 몸은 더웠고, 찝찝한 몸을 씻기가 번거로웠다. 샤워장과 화장실도 멀었고 그나마 이용한 곳도 불쾌감을 줄 만한 정도의 청결상태였다. 아이들이 장막의 영역을 벗어나 쨍쨍쨍쨍 내리쬐는 햇볕 쪽으로 넘어가면 소환해 오기 바빴다.
다음날엔 계곡을 찾았다. (시골 바닷가에 살면 선택지가 여러 개라는 게 좋다. 바닷가를 가고 싶으면 가고 계곡을 찾고 싶으면 얼마든 갈 수 있었다.) 목이 좋은 계곡, 내 어린 시절에 가던 그 계곡엔 여전히 많은 피서객이 있었다. 바닷가의 황량함과 차이가 났다. 거기서도 우린 수영을 했고, 돌멩이 놀이하면서 삼겹살과 라면을 먹었다. 시원한 그늘서 이 모든 걸 즐겼다는 게 바닷가와 차이였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바다보다 계곡을 찾는구나!’.
물론 일반화하긴 어렵다. 부산 해운대처럼 유명한 바다는 여전히 사람 물결이 넘실대고 이 여름에 계속 붐빌 것이다. 거긴 서울 사람도 찾는 곳이니. 하지만 내가 갔던 곳도 꽤 유명한 바다였다. 서울 사람들도 찾는다는 그런 이름있는 바다 중 하나였다.
바다와 계곡의 신세계를 경험한 아이가 당장 다음엔 계곡에 한 번 더 놀러 오잖다. 바다 더 오잔 소린 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오랜만에 의무감으로 간 바다였지만 왠지 다음에 한 번 더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바다도 이제 좀 변해야 한다. 풀 빌라와 실내 수영장이 딸린 펜션이 곳곳에 들어차고 있는 상황이다. 워터파크, 물놀이를 겸한 실내 휴양지도 싼 값에 이용할 수 있다. 반면 휴가철 바닷가는 크게 달라져 있지 않다. 밤바다의 로망을 제외하고는 이용객을 끌 만한 동력이 예전같지 않아 보인다.
음.. 허나 바다의 변화를 외치면서도 고민스런 지점은 있다. 바다가 신식화되면 바다의 낭만이 사라지려나. 좀 불편하지만 바다의 낭만은 동해의 탁 트인 수평선과 넘실대는 파도에 청춘을 맡기는, 그 자체로 찾는 게 정답일까. 어떨 땐 낭만의 소멸을 안타까워하다가도 내 몸 하나 불편하다 싶을 땐 변화를 요구하는 걸 보면, 사람 맘이 참 간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