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대한 기억
시험 과정이 험난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인생은 시험의 연속’이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은 그간의 고생을 보상해 주는 맛이 확실히 있다. 한 번 어떤 시험을 보기로 했으면 죽어라 달려들어야 하는 이유도 고생만 하고 보상 없이 끝내지 않기 위해서다. 월등히 우수한 점수로 통과하면 좋겠지만 어쨌든 그 시험을 통과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다. 내 경우에도 어떤 시험을 턱걸이로 통과할 때가 많았다. 1등이든 턱걸이든 어쨌든 통과는 통과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학 졸업 요건에 들어가는 토익 시험이다. 요즘엔 영어는 기본이고 한자 능력, 복수전공 등 졸업요건이 강화됐지만, 그 당시엔 토익이 전부였다. 그것도 내가 입학하기 한 해 전에 처음 생긴 것인데, ‘대학을 졸업하는데 무슨 요건이 필요하냐’면서 반발이 상당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 4년 내내 토익 한 번 보지 않다가 졸업 3개월을 남기고 처음 토익 공부를 했다. 토익 시험에 대해 잘 모르지만 3달쯤 공부하면 충분히 통과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이토록 무모하다. 첫 달 시험을 봤고 기분으로만 따지면 900은 당연히 넘은 듯 보였다. 하지만 성적표를 깠을 때 충격. 앞자리가 9를 거꾸로 돌린 숫자도 나오지 않았고, 졸업 요건에 무려 160점이나 모자랐다. 그때부턴 죽기 살기였다. 두 번째 시험에서 성적이 오르기는 했지만, 아직 60점이 미달이었다. 마지막 시험에서도 넘지 못하면 졸업을 한 학기 늦춰야 했다. 다른 이유도 아닌 토익 점수 때문에, 그렇게 만만하게 생각했던 영어 점수 때문에 말이다. 죽기 살기로 해도 토익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지만 죽자 살자 하다 보면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마지막 시험, 쉽게 진정이 되지 않는 마음으로 성적을 확인했다. 졸업 요건보다 5점 높은 점수가 나왔다. 단지 5점이었지만 졸업 요건을 충족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졸업 요건 통과가 나에겐 인생에 잊지 못할 중요한 순간이 됐다.
대학 입학시험도 수능에서부터 논술, 면접에 이르기까지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결과 발표는 다소 허망했다. 친구와 PC방에 놀러 갔다가 심심해서 입학 확인을 해봤다. 발표까지 며칠 더 남은 상황이었는데 웬걸. 수험번호와 비번을 누르자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표시가 떴다. 뭔가 잘못됐구나 싶어 학교 홈페이지를 봤더니 발표가 며칠 당겨졌단다. 얼떨결에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바로 집으로 달려갈 법도 했지만 PC방비가 아까워서 남은 게임을 마저 했다. 휴대전화도 없을 때인데, 집에 가서야 부모님께 합격 소식을 전했다.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초반, 1차 서류에서 죄다 탈락하는 경험을 했다. 나와 맞지 않는 영역인가 자책도 많이 했다. 자기소개서도 쓰고 쓰고 쓰다 보니 눈이 열렸다. 어느 순간부터 1차는 계속 합격, 다시 2차 필기시험이 줄 낙방이었다. 가장 좌절하고 있을 때, 언론사 시험을 접을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지금 다니는 이 회사 시험을 봤고, 결국 시험을 통과했다.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그날 오전에 회사로부터 받은 전화를 잊을 수 없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앞으로 인생 2막을 시작하기 전까진 토익이나 입학, 입사 등 정형화된 시험을 볼 일은 많이 없을 듯하다. 내 삶이 요즘 다소 무기력하게 느껴진 이유가 어쩌면 이런 상황과도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있는 이곳 일터도 긴장의 연속이고 전환의 계기가 있긴 하지만 ‘대전환’이 될 만한 게 사실 마땅찮다. 그래서 다시 든 생각.
1. 40대가 되기 전에 참 많은 정형화된 시험이 있었구나.
2. 정형화된 시험이 사라진 많은 30대, 40대들은 이 시기를 어떻게 보낼까.
3. 육아, 직장, 경조사, 사건 사고 등 비정형화된 시험이 기다리고 있겠구나.
4. 그렇다 해도 정형화된 시험이 주는 도전과 결과 관점에서 봤을 땐 둘은 다르지 않을까.
5. 비정형화된 시험을 나름 정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안주하기에는 아직 너무 젊은 나이다. 인생의 단계마다 나 자신을 시험으로 내몰기로 했다. 그 첫 번째가 출판이다. 올해 11월이면 블로그를 개설한 지 1년이 된다. 1년 기념으로 책을 내야겠다. 책에 맞게 글을 고치고 편집방향을 정하고, 출판에 대해서도 알아보려면 조금 피곤할 수 있다. 하지만 짜릿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