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발되는 심신 미약
2015년에 영화 ‘내부자들’이 있다면, 2010년에는 ‘부당거래’가 있었습니다. 주연의 직업군이 검사, 언론인, 조폭이라는 공통점이 있죠. 케이블에서 방영해주는 부당거래를 어제 오랜만에 다시 봤습니다. 역시 5년 전 영화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재미가 있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내부자들보다 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 이야긴 여기서 그만하죠.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까.
부당거래를 보면,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계속된 검거 실패로 민심이 사나워집니다. 궁지에 몰린 경찰이 최후에 꺼내 든 카드는 가짜 범인을 만들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것이죠. 경찰은 조폭의 도움을 받아 '가짜 범인 만들기'에 성공합니다. 경찰의 사주를 받은 조폭은 이 가짜 주인공을 돈으로 회유하는데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좋은 변호사를 써서 ‘심신 미약’ 작전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겠다고 회유하죠. 쉽게 말하면 살인의 의도가 있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 장애가 있어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질렀다는, 형벌보다 치료가 필요하다는 심신 미약으로 법원을 설득해 보겠다는 것이죠.
심신 미약은 한동안 법원 판결에서 가장 뜨겁게 논란이 됐던 주제입니다. 심신 미약의 의학적 기준이 참 모호한 면이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술 취한 상태에서 행한 범행에도 법원이 줄고 심신 미약을 인정하면서 공분을 샀죠. 술 취해 성폭행을 한 사람에게 심신미약을 인정하기도 했었습니다. 취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저질렀다는 것이죠.
그런데 술은 자기가 좋아서 마셨지, 또 자기 절제를 못 해서 만취한 자기 잘못이지 그걸 참작 사유로 인정해주다니. 법도 참 한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법원만의 잘못은 아니죠. 입법을 제대로 하지 않은 국회의 책임도 큽니다. 다행히 그런 사회적 비판 속에 판례도 점차 심신미약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추세로 바뀌게 됐습니다. 성범죄에서 심신 미약을 주장해도 형 감경이 힘들게 됐죠.
최근 대법원에서도 심신 미약과 관련한 두 판결이 눈에 띄었습니다.
지난해 7월 윤모(37) 씨는 만취 상태로 차를 몰고 내연녀 집에 찾아가 시비를 벌이다, 출동한 경찰관이 음주 측정을 한 데 불만을 품었습니다. 잔인하게 경찰관을 살해한 윤모(37) 씨, 대법원은 징역 35년형을 확정했습니다.
정신감정에서 윤 씨는 알코올 의존증에 충동조절장애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고, 범행 당일엔 소주 3병 반 이상을 마신 상태. 1심은 심신 미약을 인정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윤 씨가 범행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던 점 등을 볼 때 심신미약이라 볼 수 없었다는 게 법원 판단입니다. 심신미약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 범죄는 죄질이 나빠서1심부터 3심까지 징역 35년형이 선고됐습니다. 워낙에 선고한 형 자체가 강했기 때문에 심신 미약이 형량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이죠. 만약 징역 5년 정도였다면 심신 미약에 따라 +- 1~2년쯤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감자들에게 1년은 엄청난 것이죠.
정의의 여신을 형상화한 사법부 CI
대법원은 또 지인의 7살 난 딸을 강제추행한 지적장애 2급인 강모(32) 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지난해 봄과 올해 5월 고교 선배의 딸인 A(7)양을 성추행했죠.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강 씨는 지적장애로 심신 미약 상태에 있었다며 항소했죠. 2심과 대법원은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심신 미약 상태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강 씨가 비슷한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상태에서 또 범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봐 줄 여지는 더 없었던 것이죠.
재판이 점점 가해자의 상태가 아니라 피해자의 피해 정도와 상황 등을 고려해 엄격하게 심신 미약을 웬만해선 인정하지 않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건 어쩔 수 없더라도 최소한 술 취해서 잘못한 일을 "술 취해서 한 행동이니 용서해 주세요" 이런 말은 이제 통하지 않게 됐으니 충분히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겠죠. 멀쩡하면서도 심신 미약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법원도 이제 지친 게 아닐까요.
다만, 이런 심신 미약을 악용하는 다수의 범죄자 때문에 정말 감경 사유를 인정받아야 하는, 극소수의 ‘착한 범죄자’(?)들도 감형이 인정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하네요. 오해 마세요. 이런 우려는 아주 조금입니다. 죄는 엄벌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