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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유일한 사치

 다른 쪽으로는 소비에 별 관심이 없는 편이다. 옷도 편한 것만 내내 골라 입다 보니 얼마 전엔 남방 오른쪽 팔꿈치 쪽이 헤어져서 쭉 찢어져 버렸다. 그래도 그게 편해서 아내의 핀잔에도 집에선 찾아 입는 편이다. 눈에 띄면 입고, 안 띄면 굳이 입지 않는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겨우내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가 얼마 전 옷장 정리를 계기로 눈에 띄길래 입었다. 왜 안 입었느냐는 아내의 질문에 "안 보이던데". 외모에 관심을 가진다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별 개념이 없었다. 어머니가 사다 주시는 옷을 입었고, 요즘도 아내가 한 번씩 알아서 옷을 사오곤 한다.

 

 

 이런 내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는 품목이 있다. 노트와 필기구. 빈 종이가 가득한 노트를 보고 있으면 맘이 편안해진다. 뭐라도 채워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요즘은 또 어찌나 표지가 단순하면서도 끌리는 것들이 많은지. 게다가 싸기까지 하다. 물론 일부 품목들은 디자인이 가미되면서 몇천 원을 받기도 하지만 웬만해선 1000~2000원 안팎에서 살 수 있다.

 

 문방구에서 파는 500원짜리 노트는 감동 자체다. 줄무늬나 기교를 넣었다 쳐도 1500원, 2000원. 어떨 땐 사놓고 잘 모셔두기만 한다. ‘언젠가 쓰겠지’라는 마음에. 어떤 건 앞에 몇 장만 쓰고 그대로인 경우가 있다. 예전엔 이 상태가 꽤 오래되곤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이 내 방을 습격하기 시작하면서 잔여 연습장들이 모두 아이들의 상상력을 펼치는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 그 뒤론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올려놓는 수고를 하기도 한다.

 

 필기구도 만만찮다. 여러 필기구가 있다. 필기구마다 주는 느낌이 확연히 다르단 것이 매력이다. 연필이 그 중 가장 끌린다. 그림을 그릴 때도, 글씨를 쓸 때도 ‘서걱서걱’ 내는 소리가 정감이 간다. 심이 뭉툭해져 500원짜리 연필 깎기로 돌리면 잘려나가는 맛과 멋이 있다. 붓 펜은 선이 굵다. 심이 강한 붓 펜은 선 굵은 그림과 글씨에 강하고, 히마가리가 없는 심을 가진 붓 펜은 흐느적거리면서도 유려한 풍미를 펼친다. 색연필이 내는 채움의 맛은 또 어떤가. 만년필은 강인하다. 휘날리는 글씨가 올곧은 미를 풍기지만 자칫 심취해 날림으로 가버리면 답이 없다.

 

 스마트폰에 노트와 펜 기능이 장착돼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사치가 줄어드는 건 아니더라. 필요할 때 접근성이 좋아 한 번씩 끄적이긴 하지만 그 맛이 그 맛이 아니다. 내 소박한 과소비는 앞으로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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