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철학의 부재가 낳은 참사
ⓒ뉴시스 / 8일 국민의당 당명 공개에 앞서 비리혐의 연루된 영입 인사에 대해 사과하는 한상진-안철수
정치는 뜸을 들여야 할 때와 속도를 내야 할 때가 있다. 뜸 들여야 할 때 속도를 내면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우를 범할 수 있고, 속도를 내야 할 때 뜸을 들이면 정치는 뜻 한번 펼쳐 보지 못하고 뒷방 훈수쟁이로 전락할 수 있다.
김한길 의원이 지난 3일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할 때 안철수호에 합류하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탈당 직후 하지 않고, 약간의 뜸을 들여 7일이 돼서야 합류를 선언했다. 탈당으로 한 번 주목을 받은 뒤 합류로 또 한 번 주목받는 효과를 거뒀다. 탈당과 합류 사이의 이 같은 4일간의 뜸은 혼돈 야권 상황에서 김한길의 정치적 가치를 조금 더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줬다. 탈당과 합류를 동시에 선언했다면 정치적 효과는 분명 반감됐을 것이다. ‘뜸 정치’가 나름의 성공을 거둔 사례다.
속도전은 그렇다면 어떤가. 우물쭈물하다가 기차가 지나가 버릴 수 있다. 더민주에 남느냐 탈당 후 새 길을 모색하느냐, 야권 주자들의 주판 굴리는 소리가 주말인 9일에도 들려오는 것 같다. 조금만 때를 놓치면 침몰하는 배와 함께 가라앉을 수 있는데, 문제는 어느 배가 침몰할지 모르는 데 있다. 선택하고 결단하는 데까지 속도를 내야 한다. 개인이 아닌 당으로 봐서는 또 어떤가. 얼마 전까지 한 집 식구였던 문재인의 더민주와 안철수의 국민의 당 사이 인재 영입이 치열하다. 선점하지 않으면 뺏기는 무승부가 없는 싸움이다. 브레이크 없는 속도전을 펼치다 보니 결국 사달이 나 버렸다.
안철수는 8일 ‘외부 영입 1호’ 대상자 5명을 발표했다가, 3시간 만에 이들 중 3명의 영입 결정을 취소하는 발표를 했다. 3명이 청와대 구명 로비, 지인 아들 부정 채용 혐의, ‘스폰서 검사’ 파문으로 비리 등 도덕성 문제에 연루된 전력이 문제가 돼서다. 안철수의 ‘새정치’ ‘국민의’ 정치는 시작도 하기 전에 ‘구정치’ ‘그들의’ 정치가 돼 버렸다. 더민주도 상황은 비슷했다. 문재인의 첫 여성 영입 인사가 연구논문 복사 수준 표절 의혹,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미술심리치료 과정 그림 무단 사용 논란에 휩싸여 사퇴했다. 야권 주도권을 잡기 위한 속도전에 치우치다 보니 부실 검증을 피해갈 수 없었다.
뜸과 속도전이라는 ‘정치 공학’은 운이 맞으면 효과가 극대화하지만, 항상 성공을 기대하긴 이처럼 어렵다. 정치는 ‘정치 철학’을 바탕으로 긴 호흡을 요구하는데 ‘정치 공학’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정치 인생은 단명으로 끝나게 된다. 이번 사태 역시 야권의 두 당이 정치 철학을 상실한 채 정치 공학에만 골몰할 결과로 보인다.
1호 2호 3호라는 수식어를 붙여 가며 경쟁적으로 인사를 영입하고 있지만 ‘참신함’ 외에 어떤 차별적 특성을 가졌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각각의 정당이 어떤 정치 철학을 갖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은 인사를 영입했다는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영입돼 오신 분들에겐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치 철학을 함께 실현할 인재를 영입했다기보다 상대 정당보다 관심을 한 번 더 받기 위해 영입한 들러리로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분들은 그나마 참신함이 주 무기였을 텐데 표절이니 스폰서니 구정치에서 사용되는 단어들로 장식됐으니 그 효과마저 사라졌다. 정치공학은 이처럼 잘 나갈 때는 살이 붙는 것 같다가도 한번 삐끗하면 뼈만 앙상하게 남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2012년 안철수가 세간의 관심을 집중해서 받을 때, 그가 비록 이공계 계통이었지만 정치에 대한 공학적 지식이 있었나. 정치 공학은 없었지만, 철학은 가지고 있었다. 철학이 아니라고 한다면 최소한 기성 정치권을 향해 "저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라는 순진한 눈망울은 가지고 있었다. 이런 기성 정치권과 차별한 인간이 정치에 도전장을 내밀자 정치공학이 뒷받침되지 않아도 대권까지 위협할 정도로 강렬한 힘을 가져다주었다. 정치 철학의 힘이다. 이번 사태를 보며 3년이 지난 지금 안철수의 정치공학 지수는 상승했을지 모르지만 정치 철학은 퇴보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너무 큰 비약일까.
문재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대선 후보 시절부터 사람은 좋아 보이는데 도무지 그에게서 정치 철학이나 비전을 발견하기 어렵다. 여권은 말할 것도 없다. 공천 룰이라는 정치 공학에 매몰돼, 야당이 경쟁적으로 새 정치를 외치며 인재를 영입하는 이때도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주판알만 굴리며 ‘총선 180석’이라는 배부른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참사가 일어날지 모르겠다. 정치 철학의 부재는 안타까운 일이다. 정치 공학이 난무하는 정당 속에서 선택할 만한 대안이 없다는 건 더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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