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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시사스러운

말의 정치

‘권력자’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여권이 시끌시끌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국회선진화법을 언급하면서 "권력자가 찬성으로 돌아서자 반대하던 의원들도 찬성으로 돌아서 버렸다"고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데 이어 "과거는 공천권을 소수의 권력자가 밀실에서 좌지우지했다"며 연이틀 이 단어를 거론했다. 서청원 최고위원 등 친박계 의원들은 28일 작심이나 한 듯 김 대표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고, 청와대와 야권도 이 발언을 간단찮게 받아들이고 있다. 단순히 김 대표가 단어 선택을 잘못해 빚어진 일시적 해프닝일까, 말실수에 불과한 단어에 과민반응하는 것일까.


정치는 권력 표출이다. 권력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그 정치인의 말과 그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날선 발언을 날리지만, 정작 상대방이 실소로 반응한다면 ‘오버’했다는 뜻이다. 권력이 뒷받침되지도 않는 상황에서 치기 어린 투정 한 번 부려본 것이다. 초선 의원이 당 대표를 향해 펀치를 날려도 그저 웃어넘기면 그뿐이다. 하지만 초선이라도 실세 권력 편에 서 있는 자의 발언이라면 다르게 들린다. 실세 측의 의중이 실려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발언이 사실은 다수 계파의 공통된 목소리일 수 있다. 초선이 아니라 중진이라면 무게감은 또 다르다.


반면 상대방이 실소가 아닌 불편함으로 받아들인다면 먹힌다는 증거다. 권력관계가 어느 정도 대등한 수준이거나 이미 넘어섰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기서 밟아버리지 않으면 기어오르겠다는 조바심의 표출이다.



김 대표가 같은 단어를 한 번도 아니고 이틀 연속 사용했다는 점, 이에 대한 친박 측의 일제 반격과 청와대의 불편한 속내는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김 대표가 과거엔 한번씩 들이대다가도 숙이는 모습이 연출됐다. 보스 기질의 김 대표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목소리에도 딴에는 지금은 때가 아니란 판단을 했을 것이다. 당 대표 임기 2년이 다 돼 가는 지금, 총선을 80여 일 앞둔 지금 상황은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 '박 대통령 임기 후반'이 마침 이 발언으로 부각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잘 느끼지 못했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레임덕이라는 단어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전직 대통령 같았으면 벌써 레임덕이 되고도 남았다. 임기 중반만 넘어서도 측근 비리가 터지고, 검찰청 앞 포토라인에 측근들이 불려들어가는 모습이 연출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무소불위의 힘이 쇠잔해 간다. 묶어놓은 풍선의 바람이 서서히 빠져나가다가 어느 순간 측근비리와 함께 뻥 터지면서 레임덕은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온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달랐다. 특유의 ‘배신정치’의 결과물로 측근이 없다. 측근이 없으니 측근 비리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여느 대통령이었다면 총선을 앞둔 지금 벌써 풍선이 터져 레임덕이었겠지만 풍선 바람이 아직 서서히 빠져나가는 박 대통령은 그 바람이 어느 만큼 빠져나갔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김 대표의 이번 발언과 청와대의 반응은 가늠자 역할을 한다. 적어도 한 번 붙어볼 만한 수준은 됐다는 뜻이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허무하게 원내대표직을 던질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그때처럼 친박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고 있지만, 사정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이제 미디어데이 예고편을 봤을 뿐이다. 이후 미디어데이에서 펼쳐질 상향식 공천을 둘러싼 친박과 비박의 싸움을 보고 나면 총선에서 양 진영의 의석 진출, 오는 7월 치러지는 당 대표 전당대회라는 본선 게임이 펼쳐진다. 무대에 직접 오르지는 않지만 실질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박 대통령이 어떤 전략으로 대응할지, 김 대표의 다음 카드는 뭔지 흥미진진하게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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