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지출마'라는 단어는 신조어는 아니지만 이번 총선을 앞두고 유독 부각되는 단어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안대희 전 대법관에게 험지 출마를 요청했고, 당사자들도 불만이 많았지만 어쨌든 수용하는 분위기다. 쉽게 말하면 인지도도 있고, 당선 가능성이 높으니 쉬운 지역구에 갈 생각하지 말고, 당을 위해 야권이 강세인 지역에 가서 한 판 붙어 달라는 것이다.
험지(險地) : 험난한 땅
당사자 입장에서야 주목받는 것은 기분이 좋을지 몰라도 당장 당선 가능성이 떨어지는 곳에 가는 것이 탐탐찮을 것이다. 처음엔 험지출마라는 단어를 듣고 부정적 생각이 앞섰다. 지역구민들 무시하는 처사 아니냐, 지역구를 대표하는 사람이 당선돼야지 무슨 연고도 없는 후보를 여기 꽂았다 저기 꽂았다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거론되는 지역구 후보들도 불만은 마찬가지인가보다. '험지'로 거론된 지역 예비후보들 "험지의 기준이 뭐냐" 기사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오랫동안 지역기반을 닦아온 예비후보들로서는 자신의 지역구에 낙하산이 꽂힌다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내리는 낙동강의 오리알 신세는 당연하다.
출처 : 연합뉴스
곰곰 내용을 들여다보던 중, 지역 기반을 둔 사람만 당선돼야 한다면 지자체장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하나는 철옹성 같은 지역주의가 선거때마다 문제가 되는데 '지역 기반 인사의 당선'이라는 대명제는 이런 폐단 타파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 또 매년 예산철마다 반복되는 지역구 선심 예산의 폐단이 떠올랐다.
법률용어에 나오는 국회의원의 정의를 살펴봤다.
국회의원 : 국민의 대표로서 국회를 이루는 구성원. 국민의 선거로 선출
여기서 국민의 대표라는 의미는 지역구민의 대표라는 의미일까 국민 전체의 대표라는 의미일까. 물론 지역구민의 대표라는 성격도 있지만 국가의 입법을 책임지는 국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지역구보다는 범위가 넓다는 의미로 읽힌다.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의를 우선 살펴보면 차이를 알 수 있다.
지자체장 : 법이 인정하는 한도의 지배권을 소유하는 단체의 장. 주민의 복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는 등의 단체를 대표
국회의원이 지역구민보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성격이 강하다는 점은 정당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인물보다 정당에 투표하는 성향이 강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처럼 정당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인물도 중요하지만 정당의 비중이 상당하다. 300석의 국회 의석 중 무려 54석을 비례대표로 할당하고, 더 증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국민의 대표권을 선거를 통해 획득한 정당 의석에 준다는 의미가 크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한 명이라도 더 유능한 인재가 국회에 진출하는 것이 국민 입장에선 도움이 된다. 입법은 국가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국민 생활에 직결되기 때문에 지역 민원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할 때가 많다. 항상 지역 이해관계에 걸려 중요 법안이 발목잡힌 경우가 많지 않았나. 법안 개정을 할 때 지역구민의 의사와 배치되더라도 대의를 생각해서 표를 던진 의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물타기를 하며 기권을 하는 의원을 본 기억은 나지만.
대의를 생각할 줄 아는 의원이 되긴 쉽지 않다. 당장 다음 총선에 떨어질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낙선해도 더 큰 정치판에서 놀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지역구민은 외면해도 국민은 알아줄 것이다. 물론 가능성일 뿐이지만. 정치는 어차피 모험이라고 하지 않았나. 노무현 대통령이 모험 없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나.
험지출마에 대해 부정적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좀 돌아섰더니 결론적으로 급 옹호론자가 돼 버렸다. 험지출마가 우리 국회의원 선출 취지와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그렇다고 험지출마론으로 거론되는 후보를 지지하는 건 아니다. 지역에 기반을 두고 있던 예비후보들도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해 왔다면 낙하산이 내려온다고 해도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은가. 인지도만 가지고 덤벼들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누가 되느냐의 문제는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린 문제지만, 유권자 입장에선 유능한 사람이 되는 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정당도 할 일이 많다. 험지출마 후보든 지역기반 후보든 더 유능한 사람이 뽑히도록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는 것은 정당이 짊어진 과제다. 지도부가 꽂았다고 경선 절차도 없이 무조건 공천을 주거나 하면 그거야말로 공천 학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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