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들의 기억 속에 유년 시절이나 사춘기는 어떻게 기억될까. 아이들이 곤히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내 과거의 한 단면이 떠올랐다.
돌이켜 보면 추억이지만, 어린 마음에 꽤나 진지한 고민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매년 새 학기가 되면 가족사항을 적어가는 조사가 있었다. 부모님의 이름과 나이, 직업과 학력 등을 써냈다. 1학년 때만 해도 최종학력에 아버지 고등학교, 어머니 초등학교 졸업의 의미를 잘 몰랐다. 하지만 한 해 한 해 세상의 이치를 알아가면서 어린 나이에도 ‘초졸’이라고 적는 것이 꺼려졌다. 은근슬쩍 어머니 최종 학력란에 중졸이라고 썼던 기억도 있다.
부모님 직업은 더 큰 고민거리였다. 초등학생들이 죄다 꿈으로 적어 내는 대통령, 판검사, 의사, 선생님을 부모로 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명확한 직업은 자녀에게 고민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딱 부러지게 한 단어로 쓰는 게 어려웠다. 건설 현장에서 배관 기술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직업은 노가다? 배관공? 회사원? 뭐로 써야 할까. 노가다로 쓰긴 그래서 결국 타협점을 찾아 회사원이라고 썼다. 회사에 다니긴 하니 회사원이라고 합리화했지만 이 단어의 의미는 샐러리맨에 가깝기 때문에 옳지 않았다. 당장 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너희 아버지 어떤 회사에 다니시노’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뭉갰던 내 모습을 지금 돌이켜보니 참 부끄럽다. 회상록으로 시작한 글이 쓰다 보니 참회록이 됐다.
중고등학교 땐 부모님이 식당을 했다. 통닭집을 하기도 했고, 국밥집을 할 때도 있었다. 식당과 집을 따로 얻을 형편도 안 됐고, 중고등학생이었던 형과 나를 떨어뜨려 놓기도 여의치 않아 식당에 방이 딸린 집을 얻었다. 부부가 같이 일하면 다툼이 잦다는 걸 그때 알았다. 식당에서 밥 한 그릇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허드렛일이 있어야 하는지도 부모님의 식당을 보면서 알게 됐다.
치킨집을 한다고 하면 친구들은 뭣 모르고 부러워했다. 나 역시 처음엔 좋았다. 당시 귀한 음식이었던 치킨을 맘껏 먹을 수 있었기에. 하지만 잠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기름 냄새도 맡기 싫었다. 식당이 방과 붙어 있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일손이 달릴 때면 형과 배달을 갔던 적도 있다. 배달이 늦으면 짜증을 내는 손님도 만났고, 배달 시킨 집을 찾지 못해 헤맸던 기억도 있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 지금도 성격은 급하지만 배달이 늦어도 참는 편이고, 음식을 먹다 이물질이 나와도 웬만하면 조용히 건져내고 그냥 먹는 편이다. 그때의 기억 때문이다.
집이 식당을 하면 자연스레 동네 사랑방이 된다. 하교 후 집에 가면 일주일에 3~4번은 안방에서 화투판이 펼쳐진 광경을 목도했다. 야식이라는 것이 음식업계의 혁명처럼 시중에 처음 등장했을 무렵 가장 먼저 야식을 시켜먹었던 것도 우리 집이었다. 고스톱을 치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친구들 옆에서 먹었던 돈가스 등의 별미 야식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방에서 숙제하거나 공부할 때면 방문 너머 ‘쓰리고’ ‘광 팔았제’ ‘양 박에 흔들고…’ 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등학교 땐 1층이 식당 및 부모님 거주 공간, 2층 옥탑방이 형과 내가 사는 곳이었다. 창을 열어 놓으면 자동차 경적 소리가 들리기는 했지만 1층과 별도 공간이었기 때문에 손님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는 듣지 않아도 돼서 나름 편했다. 옥탑방에 떨어져 있으니 숨겨둔 야한 잡지를 몰래몰래 보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나에겐 아늑한 공간이었지만 부모님 친구분들이 놀러 와서 한 번씩 보기엔 좀 안 돼 보였나 보다. 엄마 친구 한 분이 나를 보면서 엄마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난다. "‘이런 집구석’에서 어떻게 ‘이런 애’가 나왔노." 듣기에 따라 기분 나쁜 말일 수 있는데 최소한 "‘이런 집구석’이니까 ‘이런 애’가 나왔지"라는 말보단 낫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시간은 흘러 흘러 ‘이런 애’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갔고, 내 자식이 신상을 제출하면서 적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졸업장과 직업도 갖게 됐다. 유년 사춘기 때 부모님이 직간접적으로 물려주신 삶의 자양분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이 든다.(감사합니다 부모님)
‘이런 집구석’도 부모님이 식당을 접으며 예전의 떠들썩한 모습은 조금씩 사라져 갔다. 자식들이 모두 서울로 떠난 고향 집은 예전보다 정적이다. 동네 사랑방 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인지 부모님 나이가 드셨기 때문인지.
내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면 문득문득 이맘때 내 모습이 떠오르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내 아이들의 기억 속에는 이 시기, 어느 순간 맞이할 사춘기가 어떤 모습으로 기억에 남을까. 내 어린 시절과는 너무나 달라져 버린 환경이다.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온실 속의 화초가 되지 않았으면, 난감한 상황을 만날 때도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으면, 내세울 만한 게 별로 없긴 하지만 교만하지 않았으면…. 시대는 발전했지만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한 요즘이다. ‘이런 애’가 ‘이런 집구석’에 맞게 적절히 성장했듯, ‘이런 애의 아이’도 ‘이런 집구석에서 자란 애가 가장으로 있는 집구석’에서 잘 커 주길.
괜히 감성적인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성큼 가을이 다가오려나 보다.
'인생사 > 수필인듯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청객 가을을 맞이하며 (0) | 2016.08.28 |
---|---|
영감 돋는 카페에서의 전투 (0) | 2016.08.27 |
긴장하게 되면 집중하게 되면 (0) | 2016.08.17 |
오픈 연결고리 사회 (0) | 2016.08.16 |
올림픽을 보며 떠오른 단편적 생각들 (0) | 2016.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