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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틈날 때 남기는 유서

미리 쓰는 유서 1


제목은 좀 살벌할지 몰라도, 내용은 훈훈하다. 내 아들과 딸, 아내에게 유서를 남기는 이유는, 가는 날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예고된 상황서 맞이하는 죽음은 축복이다. 하지만 그 날과 시를 내가 임의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만 알기에 언제나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갑작스레 맞이한다면 그 자체로도 가족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하고 싶은 그 많고 많은 이야기를 못 하고 간다면 큰 후회로 남을 것 같다. 기회 될 때마다 시리즈로 유서를 남겨야겠다.


유서의 대상은 아내보다 아이들에게 우선 맞춰질 수밖에 없다. 아내와는 바쁜 와중에도 잠자리에 들기 전 간단한 대화라도 하지만, 아이들과는 아직 대화가 원초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렇게 유서를 남겨 놓는다면 아이들이 언제라도 성장하면서 아비가 2016년 아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서를 남기면서도 부디, 굳이, 바램 하나가 있다면 아이들이 열 살 스무 살 서른 살이 더 돼서도 이 유서를 글로서만 만나지 않기를. 아비가 직접 아이들에게 구두로 전달하는 방식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 글에선 먼저 기본적인 당부부터 남기고 싶다.(아이들의 이름 보호를 위해 첫째인 아들은 똘망이, 둘째인 딸은 쫑알이로 칭한다.)


1. 운동

똘망아, 쫑알아. 운동은 삶의 활력소가 된단다. 지난주말 쫑알이가 낮잠 자고 있을 때 똘망이와 함께 처음으로 관악산의 작은 봉우리에 올랐구나. 사실 쫑알이가 아직 어려 그 봉우리를 함께 데려가는 건 무리였단다. 아빠와 오빠 둘 만 몰래 간 걸 용서해다오. 그때 우리 아들이 벌써 이렇게 컸나 싶었지. 등산이든, 똘망이가 좋아하는 공차기든 뭔가 하나 정도는 땀 흘릴 운동을 가까이하렴. 운동은 생각 이상으로 큰 에너지를 준단다. 쫑알이는 운동보다 인형을 더 좋아하는데, 좀 더 크면 오빠랑 같이 등산을 하자꾸나. 우리 가족 모두가 관악산 정상을 한 번 오르는 그때를 기대하며..


2. 공부

솔직히 아빠는 공부 말고 다른 재능이 없었단다. 공부가 꼭 재능이었던 건 아니지. 유일하게 꼽으라면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인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이 순간에도 공부에 비중을 많이 두고, 너희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사실이지. 그런 점을 고려하고 들어주길 바래. 하고 싶은 일들, 내 적성에 맞는 일들이 있다면 멋지게 재능을 살려 달려나가길 바란다. 하지만 재능이나 꿈 자체를 찾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일찍 발견할 수도 있지만 사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발견할 수 있거든. 꿈이라고 생각했던 일도 막상 그 꿈을 실현하고 나서는 아니란 생각이 들 수도 있단다. 이도 저도 아니다 싶으면 공부를 우선 열심히 하는 걸 추천.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인생에서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 건 사실이란다. 그렇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안 된다 해서 크게 좌절하지도 마라. 뭐든 거침없이 도전해 보길 바래. 


3. 인간관계

인간관계가 사실 답은 없단다. 직접 부딪혀가며 몸소 익히고 배우고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 것이기에 말로 하기도 참 쉽지 않은 주제야. 이 부분은 너희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경험하는 것에 대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구나. 유일한 가르침이 있다면 내 아버지이자 너희 할아버지에게서 어릴 때부터 아빠에게 전해준 가르침이야. "누구를 만나든 먹는 거 사는 걸 아까워하지 말아라".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셨어. 좋은 선물을 사줄 능력은 되지 않겠지만, 친구들 만나 간식 사는 것 정도는 그리 아끼지 말아라.


여러 가지 남길 말들은 생각날 때마다 그때 그때 '미리 쓰는 유서 0'이라는 제목으로 남기도록 할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