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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시사스러운

올해 10대 사건 후보, 생일 축하 난(蘭) 파문

 ‘생일 축하 난(蘭) 파문’과 관련한 박근혜 대통령의 질책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정무수석이 야당의 호의를 거절하는 황당한 일을 했다. 축하 난은 한파 속에 홀로 외로웠고, 삼고지례(三顧之禮) 끝에 제 주인을 찾아갔다. 야당도 "설마 대통령의 뜻이었겠느냐"며 사태 수습을 받아들이고 있고, 청와대도 정무수석의 판단착오라며 ‘꼬리 자르기식’으로 마무리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정무수석만 질책한다고 해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을까.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과연 청와대와 야당이 한목소리로 지목하고 있는 정무수석일까.

 

ⓒ뉴스원 / 2일 오전 거절당한 채 남겨진 시련의 난

 

 박 대통령이 보고를 받기 전까지 여의도와 청와대는 그들만의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2일 오전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이 박 대통령의 64번째 생일을 맞아 축하 난을 보내기로 했다. 쟁점법안 처리를 놓고 대립 위치에 있었지만, 국가 수장에 대한 예우였다. 더구나 지금은 비록 정적이 됐지만 4년 전만 해도 김 위원장은 박 대통령과 한 배를 탔던 경험 많은 조타수였다. 더민주는 축하 난을 전하려 했다가 정무수석으로부터 세 번에 걸쳐 사양한다는 뜻을 들었다. 전하고 싶어 전한 것도 아니었고, 없는 맘 짜내서 시늉이라도 해 보려 했던 더민주 입장에선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오전 김성수 대변인이 했던 "황당한 일이 있다. 저로서는 납득이 안 간다"는 말 속에 야당의 표정이 그대로 녹아 있다. 박 대통령은 오찬 뒤 현기환 정무수석의 보고를 받고, 크게 질책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2016 생일 축하 난 파문’의 진상 보고서다.

 

 이 사태를 보면서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올랐다.

김 과장과 이 부장이 있다.
어느 날 김 과장이 "부장님, 00건은 0000게 처리하면 될까요?"
돌아오는 답은 "아니, 과장씩이나 됐으면 알아서 해야지, 내가 언제까지 일일이 알려줘야 해?"

며칠 뒤 이 부장이 "00 부서에서 들어온 협조 요청 어떻게 할 거야?"
김 과장 "제가 단칼에 거절했죠. 부장님이 타부서에서 들어온 협조 요청 싫어하는 거 잘 아니까 제 선에서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이 부장 "김 과장, 제정신이야!"
김 과장으로선 억울했다. 회의나 사석에서도 늘 ‘죽 쒀서 개 줄 일 있느냐’며 지원 요청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 부장 아니었나.

 

 정무수석은 정부와 여야, 국민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자리다. 소통이 기본사양으로 탑재돼 있어야 한다. 또 한편으론 대통령의 뜻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해야 하는 자리다. 여기서 이번 사태의 엇박자가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정무수석이 소통해야 하는 자리로만 생각했다면 야당이 보낸 축하 난을 즉각 받았을 것이다. 축하 난 하나에 불과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꽉 막힌 쟁점법안 처리의 물꼬를 트는 시발점으로 작용했을지 어떻게 알겠나. 그러나 현 수석은 아마도 소통의 역할보다 대통령의 의중이라는 후자의 역할을 더 염두에 뒀던 것 같다. 박 대통령의 평소 ‘지시 강조사항’, '불통'의 리더십을 종합해 볼 때 축하 난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난이 전달되고 나서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정무수석이 합의된 법안조차 처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축하 난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해 사양한다는 뜻을 (더민주에) 전했다"면서 "박 대통령이 나중에 이를 보고받고 크게 정무수석을 질책했다"고 해명했다. 더민주 측도 실무진 선의 판단으로 생각하고, 기분은 나쁘지만 더 문제 삼지는 않았다. 하긴 이런 해프닝으로 죽기 살기로 달려 들어봐야 덕 볼 것도 없다.

 

 그저 웃고 지나가려 했지만, 청와대의 해명이 자꾸만 거슬린다. 누가 누구를 질책한다는 말인가. 거절하게끔 만들었던 환경과 상황, 축적된 선례를 제공한 것이 누군데 정무수석 개인의 잘못으로 끝내려 한다는 말인가. 점심 먹기 전 지인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아무리 경색 국면이라도 설마 생일 축하 난을 거절했겠어?", "왠지 박 대통령이라면 그랬을 거 같은데?" 적어도 이 대화 사이에 정무수석은 없었다. 김 과장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분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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