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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시사스러운

여당, 막가파 행태에도 '당헌당규' 앞세우는 이유

쌍방 간의 분쟁에서 어지간히 다투다 보면 나오는 말이 있다. ‘법대로 하자’

법이 상대방이 아닌 내 편에 서는 순간 승자는 자명하게 갈린다. 아무리 상대방이 뭐라고 떠들어대도 법이 내가 맞는 것으로 결정 내리면 분쟁은 거기서 끝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법이 내 편인지 니 편인지 모를 때 발생한다. 이럴 땐 한 사람이 ‘법대로 하자’고 우기면, 상대방 역시 ‘그래, 법대로 하자’고 맞받아친다. 서로 법이 자기 편이라고 우기니, 판결이라도 나기 전까진 누가 승자인지 판가름할 수 없다. 일상다반사는 송사로 이어지면 판결이라는 결론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정치권에서 우겨대는 ‘법대로 하자’라는 다툼은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을까.

출처 : 서울신문

 

서두에서 이 말을 꺼낸 이유는 새누리당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공천 다툼이 점입가경이다. 공천 룰을 둘러싸고 지도부에선 연일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18일에 최고위원 회의에서는 응축된 갈등이 폭발하는 분위기였다. 며칠 전엔 '지더라도 선거 못한다'는 말이 나오더니 이날엔 '막가파'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이 싸움이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격한 표현이 나와서만은 아니다. 대척점에 서 있는 김무성 대표와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이 둘 다 ‘당헌·당규대로 하자’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당헌은 정당에서 내부적으로 정한 강령이나 기본 방침이고 당규는 이를 실현하는 규칙이나 규약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당헌은 당의 헌법이다. 둘 다 당의 헌법대로 하자고 하니 그렇게 하면 될 법한데 왜 저리 다투는 걸까.

 

잠시 문제가 되고 있는 우선 추천 지역과 관련한 당헌 당규를 살펴보자.

당헌 103조 
‘우선 추천지역’이라 함은 ‘여성·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의 추천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지역’ ‘공모에 신청한 후보자가 없거나, 여론조사 결과 등을 참작해 추천 신청자들의 경쟁력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한 지역’을 말한다.

 

여기서 쟁점이 되는 부분은 앞에 나온 여성·장애인 부분이다. 이 조항에 근거해 이한구 위원장은 광역단체별로 우선 추천 지역을 1~3곳을 정하겠다고 했다. 언뜻 보면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장애인’이 먼저냐 ‘지역 선정’이 먼저냐에 따라 이 조항이 달리 해석될 수 있다. 쉽게 말해 ‘후보자로 선정할 만한 여성·장애인이 있고, 그에 맞는 우선 추천지역을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김무성 대표의 주장에 가깝다. 반대로 ‘우선 추천지역을 광역 단체마다 일괄적으로 선정해 이 지역에 여성·장애인 등 정치적 소수자를 추천한다’고 본다면 이한구 위원장 안에 가깝다.

 

둘의 차이는 크다. 김무성 대표 측이 반발하는 이유는 이한구 위원장 안인 후자대로 한다면 상향식 경선을 거치지 않고도 현역 의원들을 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에 3곳을 우선지역으로 선정해 놨는데 만약 정치적 소수자가 없다면 어찌될 것인가. 즉, 이한구 위원장 안은 기존의 전략공천 혹은 더 들어가서 좋게 말하면 자격 없는 현역의원 물갈이, 나쁘게 말하면 공천 학살의 연장선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조항을 놓고 친박계와 비박계가 '해석 논쟁'에 뛰어든 모습이다. 친박계는 이한구 안이 당헌 당규에 맞는다고 하고 있고, 비박계는 당헌·당규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맞서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은 어떻게 날까. 정치권, 범위를 좁혀서 정당 정치인들, 특히 국회의원들은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입법가들은 걸리적거리는 게 있다면 ‘법을 바꾸면 되지’라는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법대로 해야 한다’는 기조가 뼛속까지 박혀 있는 법률가들과 생각 자체가 다르다. 이런 사고 체계를 가진 정치인들이 당헌·당규가 설사 걸리적거린다면 '바꾸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게다가 이 조항은 바꿀 필요도 없다. 법 조문이 아니라 해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기 쪽에 유리한 것으로 해석을 정하면 된다. 이런 해석론 싸움은 일반법에서도 나타난다. 헌법에서 하위 법으로 갈수록 심하다. 시행령의 경우 제정 권한이 입법부에 있는지 행정부에 있는지, 두 기관이 충돌할 때 사법부가 최종 권한을 갖는지 등은 나라별로 다르다. 하물며 일반법도 아닌 새누리당에서만 통하는 당헌·당규야 누가 그리 구속력이 강하다 생각하겠나.

 

이를 위반했을 때 당에서 제약을 받는다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제약을 가하는 기관이 곧 최고위 등 당 지도부, 의원총회, 중앙위원회 등이다. 거기서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게 된다. 이 싸움의 본질은 당헌·당규를 앞세운 세력 싸움이다. 싸움의 승패는 들러리로 서 있는 당헌·당규의 법조문으로 판정나지 않는다. 결국 세력이 큰 쪽, 명분 싸움에서 이기는 쪽이 승리하는 게임이다. 이번 싸움이 흥미로운 것은 누가 이 싸움에서 우위를 가져가느냐를 보면 4·13 총선의 새누리당 세력 분포를 예견할 수 있다. 또 이후 당권 경쟁에서 어느 쪽이 승리를 가져갈 것인지 점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서로 '당헌당규에 따라야 한다'는 공천 전쟁은 어지간히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 일반 국민들이 잘 알지도, 또 알 필요도 없는 당헌·당규를 미끼로 저리도 민심과 동떨어진 싸움을 하는 걸 보면 어느 쪽이든 이번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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