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사/시사스러운

존영이 존엄으로 보이다니. 착시 현상에 빠진 나만의 잘못?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대통령 존엄’ 논란? 인터넷을 뒤적뒤적하다 발견한 기사 제목 때문이었다. 곧 내 착각이란 걸 깨달았다. 존엄이 아니라 ‘대통령 존영’ 논란이었다.(관련 기사) 기사 제목을 잘못 본 것이다.

 

출처 : 연합뉴스(바로가기)


실소가 나왔다. 존영을 존엄으로 착각하다니... 따지고 보면 나만의 잘못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단어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존영이라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라 그나마 익숙한 존엄으로 보인 것이다. 존영이 무슨 뜻이야? 나만 모르는 단어인가? 사전을 검색해 봤다. 존영(尊影)은 ‘남의 사진이나 화상 따위를 높여 이르는 말’이었다. 그냥 ‘박근혜 대통령 액자 논란’이라고 하면 되지 꼭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써야 했을까, 이런 의문이 들었지만 금세 궁금증이 풀렸다. 새누리당 대구시당이 탈당한 유승민 무소속 의원 측에 보낸 공문에 ‘대통령 존영 반납’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었다. 공문에 그렇게 돼 있었으니 기사도 그렇게 나왔나 보다. 알고 보니 존영이라는 단어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절에 썼던 말이라고 한다.


한번 착각은 근거 없는 확증을 불러일으켰다. 표면적인 제목은 ‘존영 논란’이었지만 이후 어떤 관련 기사를 봐도 ‘존엄 논란’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두 단어의 어감이 묘하게 비슷하다. 존엄(尊嚴)은 ‘인물이나 지위 따위가 감히 범할 수 없을 정도로 높고 엄숙함 또는 예전에 임금의 지위를 이르던 말’이다. 무협지를 자주 본 사람은 ‘절대 존엄’ ‘최고 존엄’ 등의 단어가 익숙할 것이다.

 

존영 속 주인공인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우고 난 뒤, 당에서도 공천 컷을 당한 무소속 의원들이 박 대통령 사진을 새누리당에 반납하지 않겠다고 했단다. 자신을 버린 주군을 향한 절대 충성심의 발로인가, 아니면 선거에서 존영을 이용하고자 함인가, 그도 아니면 존영에 대한 모독인가. 대체로 새누리당 핵심 친박계는 존영을 반납하지 않는 의원들에 대해 세 번째 해석인 존영에 대한 모독 내지는 선거에의 이용 정도로 해석하는 것 같다.

 

김무성 대표는 그런 논란이 선거에 일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말라고 했지만 절대 존엄을 중시하는 이들에겐 그리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닌가 보다. 하긴 공천 국면에선 선거에 지더라도 정체성을 세우고 가자고 말했던 이들이니, 그들의 기준에서 바로 세울 건 세우고 가야 하겠지. 당 대표가 뭐라 하든, 어차피 존엄의 눈 밖에 난 당 대표이기 때문에 상관할 바 아니라는 ‘대놓고 무시’ 기운도 느껴진다.
 

출처 : 한국일보(바로가기)

 

존엄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번 정권에서 유독 유사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유승민 의원이 지난해 새누리당 원내대표에서 쫓겨나다시피 할 때도 여당에선 "절대 존엄에 대들면 따끔한 맛을 본다"는 해석이 주류였다. 이 정권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진영 의원이 컷오프된 것도 '존엄에 대한 반기'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존영을 반납시켜 존엄을 세우든 존영을 보존해 존엄을 짓밟든 존영이 떠나간 자리를 짝퉁 존영으로 대체해 존엄을 세우거나 말거나, 저들만의 리그이니 간섭할 바 아니다. 문득, 이런 논란을 보고 있다는 자체가 참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무협지 속 판타지를 보는 것도 아니고 요즘 시대에 정치판을 보면서 ‘절대 존엄’ ‘최고 존엄’을 떠올리다니. 착시 현상에 빠진 나만의 잘못일까.

 

2016/03/29 - [세상사/책책책] - <정의를 버리며> 

2016/03/26 - [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 팝송을 듣는 계기가 된 예기치 않은 사건 

2016/03/24 - [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 익숙한 것들에 대한 문제 제기

아래 '♡'를 꾹 눌러 주시면, 동기부여가 됩니다. 

 

블로그 하면서 알게 된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