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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관심과 지나침

이곳에서 출퇴근 한지 어느덧 1년이 됐다. 복도를 오간 날이 수백여 일인데, 소화기의 존재가 눈에 들어온 건 오늘이 처음이다.


관심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이유는 내 관심 분야에만 눈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소화기의 존재는 내 안중에 없었다. 365일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난 그저 지나쳤다. 하지만 내가 화재를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사정은 달랐으리라. 화재로 트라우마를 겪은 적이 있다면 아마도 이곳에 온 첫날, 소화기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겠지.


지나침이다. 내 삶에 당장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쉽게 지나친다. 내 몸에 대해서도 지나칠 때가 많았다. 20대 건강했고, 30대도 그럭저럭 살았다. 내 몸에 고장 난 곳이 별로 없어서인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건강한 몸이 당연한 것처럼. 30대 중간을 몇 해 넘긴 요즘 좀 달라졌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 축구를 하면서 다소 과하게 발을 썼던 탓인지 요즘 무리한 다음 날이면 오른 무릎이 뻐근함을 느낀다. 지나쳤던 신체 부위가 처음으로 예사롭지 않게 관심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어르신들이 흔히 "뼈 마디마디가 쑤신다"고 하지 않나. 나이가 들면 어찌할 수 없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관련된 부분이 등장한다. 시편 22편에서 저자는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다"고 표현했다.


건강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뼈들이 아플 때는 마디마디가 인식될 정도로, 더 극심한 고통에 들어가면 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각별한 존재로 인식된다. 무릎 관절염을 겪어본 사람이 무릎의 존재를 인식하고, 속 쓰림을 경험한 날 위장의 위치가 인식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 몸에 붙어 있는 부위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관심은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을 때 두기 시작하면 늦다. 뻐근거리는 내 무릎의 존재 역시 사전에 좀 더 주의를 기울여 관리했다면 좋았을 뻔했다. 지금이라도 깨달았다니 한편 다행이다. 소화기의 존재도 불이 난 뒤 그제야 허겁지겁 관심을 둔다면 한발 늦는다. 화재는 순간이다. 지금이라도 소화기를 눈여겨 본 게 다행이다. 


관심이냐 지나침이냐는 사실 소화기 안전핀만큼 작은 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