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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정적이 흐르는 거실에서




아이들의 빈자리는 고요하다. 으레 있어야 할 우격다짐과 떼씀이 없는 거실 한가운데가 허전하다. 아이들이 갖고 놀던 토끼 인형과 자동차, 오빠와 동생이 ‘내 꺼야’를 외치며 서로 가지려고 했던 딱풀, 책장에 꽂힌 책들을 너도나도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던 그 얼굴이 내 기억 한편에서 지나간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덤이다. 외갓집에 가기 전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아부었던 것으로 보이는 변신 장난감은 내 눈앞에 남아 그날 아이의 손길을 되짚어보게 한다.


아내와 두 아이가 멀리 있다. 그들은 처가에, 나는 아가(我家)에 있다. 이틀이 지났다. 얼마만의 자유란 말인가. 맘껏 누리려 애쓰고 또 애쓴다. 퇴근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간표까지 머릿속에 그려 봤다. 이 소중한 혼자만의 퇴근 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기 위해서다. 육아 부담에서 잠시 벗어난 건 큰 기획 하나를 마감했을 때 잠시 찾아오는 해방감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허전하다. 문을 열고 집에 발을 들이기도 전,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가 오늘은 없다. 옷도 벗기 전, 자신이 만든 블록 창작물을 허겁지겁 자랑하느라, 앞뒤 맥락 다 잘라먹고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듣기 어렵게 설명하던 그 흥분의 시간도 없다. 동생이 자기를 밀었다는 둥 오빠가 엄마한테 혼났다는 둥 녀석들이 밉잖은 고자질쟁이로 잠시 변신하는 순간도 없다. 아이들의 ‘퇴근 보고’를 한참 듣고서야, "아빠 옷 좀 갈아입고"라며 중재에 나서는 아내와 간신히 눈인사를 나누는 찰나도 없다.


자유에 대가가 따르듯, ‘육아 자유’에는 ‘육아 공허’가 있다. 그러면서도 평소 맘껏 틀지 못했던 TV와 영화를 보고, 짱 박아놓은 과자를 아이들의 눈을 피해 먹지 않아도 될 때면 자유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 그러다 또 정적을 맞게 되면 허함을 느낀다.


이래서 가족이다. 마주 보고, 부대끼고, 소리치고, 웃고 떠들고, 혼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서운하고, 달래고, 안아주고, 피곤하고, 힘을 받고, 하품하고, 사진 보고, 희생하고, 걱정하고, 맡기고, 신나고, 졸리고, 밀고 당기고, 그립고, 자유가 그립고, 나누고, 함께하고, 떨어지고, 생각나고, 보고 싶고, 다시 만난다.


가족에 대한 생각은 어느덧 위로 향한다. 아버지 어머니가 생각난다. 내 아들, 내 딸 반만큼, 반의반만큼이라도 내 생각 속에 있었나. 처가에 간 아이들과 헤어짐은 잠시 잠깐인데, 20여 년을 함께 했던 아비 어미는 맨날 떨어져 지내도 꼭 이럴 때만 생각나는 걸까.


죄송하다.
내 밑의 가족에는 수식어가 저리도 많은데, 내 위의 가족에는 이리도 인색할까. 죄송하다. 전화 한 번 드려야지 생각했는데 벌써 며칠이 지나가 버렸다. 지금 전화하기엔 시간이 오래다. 전화 드려도 사실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는 게 전부지만, 내일은 꼭 드려야겠다. 위아래 가족과 멀리 떨어져 있는, 조금 늦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