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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엉뚱한 생각

소주 한 병에 담긴 아무개 씨 사연

토요일 아침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하러 간다. 아파트 앞에는 공원과 산이 연결돼 있어 산책에 그만이다. 공원에서 술래잡기와 숨바꼭질을 신나게 하고, 가까운 산에 올라 흙 놀이 등을 하면 한두 시간은 금방이다.
이 사이 아내는 카페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긴다. 짧은 시간이지만 아내가 육아라는 축복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다. 쓰고 보니, 참으로 자상한 남편이다. 자화자찬은 일단 여기까지.


매주 가다 보니, 공원 벤치 옆에 있는 소주 한 병이 늘 눈에 띈다. 어떨 땐 한 병, 어떨 땐 두 병이다. 매번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은 왠지 소주병에 마음이 갔다. 몇 가지 떠오른 생각들.



1. 그는 안주 없이 강소주를 마셨을 확률이 높다. 주변에 안주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주병도 놓고 가는 사람이, 안주만 치웠을 리가 없다.
2. 그, 아니 그녀일 수도 있다. 그일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어쩌면 그들인지도 모른다.
3. 여하튼 아무개 씨는 금요일 밤 혹은 토요일 새벽 습관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등산객들이 많은 곳이라 보통 평일에 매일 공원이 청소되는 걸 보면, 목요일 마신 소주병이 토요일까지 남아 있긴 어렵다.
4. 여름 가을에는 그렇다 치고, 겨울에도 소주병이 있는 걸 보면 아무개 씨는 추위는 크게 아랑곳하지 않는 이일 가능성이 크다.
5. 꼭 같은 자리에서만 마신다. 뭔가 나름의 기준을 가진 사람이다. 아니면 다른 자리에 마시고 그 자리에 빈 병을 놔두고 가는 것인지도.
6. 제도권에 항의하는 성향이 높은 사람일 수 있다. 술병이 놓인 자리 바로 옆에는 보란 듯 금주 금연 팻말이 꽂혀 있다.
7. 내 이웃일 가능성이 크다. 멀리 사는 사람이 야심한 시각 이곳까지 찾아와 소주 한 병을 남기고 가는 건 쉽지 않다.
8. 사연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강소주 한 병으로 한 주간의 시름을 떨쳐버리는 낙을 가진 자인 지도 모른다.
9. 어쩌면 청소년? 집에서 마시지 못해 나와서 마시는 걸까. 하지만 소주 한 병을 들이키고 집에 들어가면 술 냄새가 날 텐데
10. 영화나 추리 소설이라면 반전이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술을 마신 이가 궁금해 금요일 밤에 몰래 공원에 나갔더니, 술을 마신 이는 바로, 이 글을 쓰는 바로 당신이야! 뭐 이런. 하지만 최소한 나는 아니다. 반전 가능성은 없으니 긴장하지 마시라.


어쨌든 궁금해진다. 아무개 씨의 인생에 이 소주 한 병은 어떤 의미일까. 덩그러니 놓인 소주병을 보고 별별 잡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