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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물량공세 시대 창의교육

당신은 혹시 소크라테스?

 

대학이 곧 사회생활 수준을 결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직업이 수준을 결정하는 단계가 왔다. 하지만 요즘은 그것도 넘어섰다. 같은 직업이라도 수준이 천차만별이다. 과거 기득권으로 간주했던 직업들이 물량공세 앞에서 모두 그 위력을 상실했다.

 

변호사만 해도 한때 사시만 패스하면 결혼 직장은 물론 노후까지 보장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변호사 2만명 시대’ 로스쿨 등 쏟아지는 법조인들로 인해 변호사 명함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 됐다. 우리 초등학교 시절 장래희망을 조사할 때면 습관적으로 적어내던 의사도 마찬가지다. 개업 못 하는 의사들이 넘쳐난다. 언론 환경만 봐도 그렇다. 지금은 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도 뉴스가 튀어나오고, 엇비슷한 이름의 신문들로 넘쳐난다. 업계에 오래 있었던 부장급 정도의 기자가 초임 시절, 출입처마다 손에 꼽을 수 있는 기자들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어딜 가나 만원이다. 게다가 9월 말부터 김영란법 시행으로 ‘공무원 등’으로 신분 격상한 언론인들의 생활에도 상당한 변화가 예상된다. 공무원들은 안정성 빼곤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60세 시대 때야 안정적 직장이지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는 연금을 고려하더라도 60세까지의 안정성이 얼마나 큰 메리트일까 싶은 게 솔직한 생각이다.

 

이렇듯 기득권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죽어라 외워 시험 보고, 죽어라 경쟁해서 번듯한 직업을 갖는 게 힘들다. 설사 갖더라도 끝이 아닌 시작이고, 언제 없어질지 알 수 없는 직업일 뿐이다.

 

내 아이가 갖게 될 직업이 뭘까 떠올려 볼 봤다. 옛 사고에 갖혀서인지 답답함밖에 들지 않았다. 선뜻 어떤 직업을 추천하기가 쉽지 않았다. 창조라는 단어가 떠오른 건 그런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을 하던 끝자락에서다. ‘결국은 창의적 직업이 살아남겠구나’. 창업이든 창작이든 창조적 직업이 주목 받는 시대가 됐다. ‘창조적 직업’이라 규정할 수도 없는 그런 ‘창조적 일’이 주목받는 시대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니 뭐니 사회적 기준에 맞춰서 직업과 할 일을 선택하던 것은 이미 내 아이 세대에는 맞지 않는다.

 

고민은 여기서 다시 시작이다. 사회는 변해가는데 교육 정책은 제자리다. 정치권에서는 교육 혁명을 떠들고 있지만, 공교육 현장은 쉽게 바뀔 분위기가 아니다. 교육 틀을 바꾸지 않고 정책만 찔끔 바꾸면 결국 현장에 있는 아이들에게 혼란만 줄 게 뻔하다. 혁신적인 교육 패러다임 변화 없이는 넘쳐 나는 아이들을 공교육 저예산으로 책임질 수 없다. 그래서 창의적 인재를 키워내는 역할은 사교육 몫으로 돌아갈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창의적 교육마저도 사교육, 즉 돈이 앞장서 담당하게 된다면 내 아이 세대들이 사회의 주축이 될 때쯤엔, 결국 그런 사교육을 받을 만한 위치의 아이들이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높다. 부의 대물림이 가속화되고 공고화된다는 건 빈말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돈으로 아이들을 교육할 만한 여건이 안 되는 나 같은 아비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키워야 할까. 창의 교육을 이 밤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유다. 비창의적인 사회에 살든, 아니면 내가 창의교육을 사교육에 맡길 만한 재력이 있든 둘 중 하나의 여건이 주어졌다면 이런 깊이 있는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 중 이 사회 변화를 내 힘으로 뒤집을 만한 여력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후자를 어떤 식으로든 극복해야 한다. 평소 치맛바람을 경계하던 나지만 그래도 아비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지, 너 살 궁리 너 알아서 하라는 것도 좀 무책임하단 생각이 들었다. 아비로서 할 수 있는 마지노선 역할은 무엇일까. 돈이 없으면 지혜를 발휘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사색하는 힘을 길러주는 데 일정 역할을 담당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뻔한 듯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다. 쉽진 않지만, 마음 먹으면 나 같은 비 재력가도 가능하다는 게 장점이다. 사색의 힘은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대화에서 시작된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아비로서 아이가 던지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는 게 기본이다. 다짐과 결단과 실천, 거기에 또다시 지혜가 필요하다. 꼰대도 아니고 무턱대고 앉혀놓고 대화하자고 해선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자연스레 아이와의 접촉점을 늘리는 취미 활동을 소망하게 됐다.

 

오늘 집으로 오는 길에 마음먹은 내용이다. 그러면서 아이가 말이 트이기 시작하면서 연발 날아오는 질문에 귀찮다고 건성으로 대답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른 일을 한다는 핑계로 말을 끊었던 기억도 났다. 반성했다. 사색의 힘은 부모와의 단절된 대화에서 절대 싹틀 수 없다. 열과 성을 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 이 사회의 거대 공룡과 맞설 수 있는 나만의 방식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