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공학이라기보다는 생물에 가깝다. 자연과학적 원리와 방법으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지난 총선 때 당의 공천에 반발해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던 인사들이, 어느덧 복당하고 당 후보로 출사표를 던지는 것을 본다. 당시엔 해당(害黨) 행위로 영원한 이별을 고할 것 같았지만, 뿌리째 자르지 않은 당심이 근원(根源)이 되어 또 싹을 피운 것이다. 옛 상처를 딛고 새싹이 돋아나는 ‘봄날의 풍경’은 여야 할 것 없다. 너무나 흔하지만 대표적 사례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다. 2011년 오 전 시장이 시장직과 연계한 무상급식 반대 카드를 섣불리 꺼내 들었다가 불발되자 여당은 들끓었다. 여당은 사실상 내부의 적으로 규정했다. 야당은 덕분에 대통령을 제외한 선출직 서열 톱인 서울시장 자리를 꿰찰 수 있었으니 오 전 시장은 최소한 공공의 적은 면한 셈이다. 정치 생명이 끝났단 말이 들렸다. 그러나 채 4년이 걸리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더니 어느 순간 여권 대선 주자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가 생명력을 가졌다 해도 싹이 다시 돋아나기 위해 지켜야 할 선은 있다. 이 선을 넘어버리면 싹은 뿌리째 말라버린다. 새싹이 돋아나는 현상은 ‘정치=생물’로밖에 설명할 수 없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어디까지인지는 최소한 ‘정치=공학’이라는 공식을 빌릴 수 있다. 정치인들이 다시 일어설 때에는 최소한 ‘명분’, 아니면 ‘중간지대’라는 공학적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2007년 한나라당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 박근혜 전 대표와 함께 대선후보 경선 3각 구도를 형성하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장고 끝에 야당행을 선택할 때, 최소한 "낡은 수구·무능 좌파 타도하고 새 길로"라는 명분은 있었다. 정치생활 내내 철새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했지만, 이 같은 장고 끝에 내세운 명분은 그를 야당 대표에까지 올려놓기도 했다.
2011년 새누리당 쇄신파인 정태근·김성식 의원이 "여당은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며 나란히 탈당했지만, 행보는 갈렸다. 정태근은 무소속을 유지한 반면 김성식은 안철수를 지원하고 나섰다. 결국 정태근은 낙선 후 새누리당에 복당할 수 있었지만, 김성식은 재야에 머물고 있다. 물론 김성식은 여당에 돌아오지 못한다기보다 안 돌아오는 측면이 강할 것이다. 어쨌든 돌아올 의사를 밝히더라도 공학적으로 볼 때 복당은 어려울 듯 싶다.
최근 정치를 생물로도 공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사례가 생겨 여러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주인공은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이다. 내년 총선에서 부산 기장군 출마를 준비 중인 김 전 원장은 노무현정부의 대표적 인사다. 하지만 지난 8월 말 비밀스럽게 팩스로 새누리당에 입당원서를 보냈다. 그 뒤에는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의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중간지대를 넘나드는 과감함은 여야 모두를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 전 원장은 정서가 여당에 맞고 진보 진영도 잘 이해한다고 명분을 밝히고 있지만, 최소한 그런 명분을 관철하려 했다면 애초 여당 입당을 공개리에 천명했어야 옳다. 이쯤 되면 공학적인 선을 확실히 넘었으니 생물학적으로도 도저히 재생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11월 9일 김 전 원장이 밝힌 출사표는 이를 넘어서려 하고 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밝힌 김 전 원장은 "(무소속이든) 어떤 형태로든 출마해 당선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야를 넘나드는 김 전 원장의 가세로 어쨌든 기장군은 내년 총선에서 뜨거운 선거구가 됐다. 아무리 정치가 원칙도 철학도 없다고 욕을 먹는 시대지만, 최소한의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을 다음 총선에서 득표율로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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