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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틈새 글쓰기

글쓰기의 유용함


-깊이
책을 읽을 때만 사고가 깊어지는 게 아니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괴발개발 백지에 끄적인 시라도 그냥 시가 되는 건 아니다. 적어도 사물을 흘려볼 때보단 더 관찰하게 된다. 시의 대상이 본질에 관한 것이라면 그 내면을 한 꺼풀은 더 들여다볼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된다. 시를 쓰지 않았을 때에는 헬스장 바깥에 비친 소나무가 그냥 소나무였다. 하지만 시의 관점으로 봤을 때 세간의 괜한 오해를 받고 있는 소나무로 나에게 다가오더라. 남들은 지조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과연 소나무는 그런 평가를 달가워할까. 뜨거운 태양 아래 그저 자신도 그늘에 숨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


-기록
일기를 썼을 때가 언제인가. 초등학교 때 이후 군대에서 17주 훈련을 받을 때 의무적으로 수양록을 썼다. 지금도 책상 서랍에 꽂힌 수양록을 볼 때면 그때 기억이 난다. 사진도 기록이지만 당시의 내면의 모습까진 담을 수는 없다. 글은 그게 가능하다.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든 아니면 타인에 대한,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든 그 글은 당시의 내 내면을 담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거나, 책을 써내려간다는 건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날마다 써내려가는 것과 같다.


-반복
독서에 물이 오르면 속도가 나도 모르게 빨라진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글도 쓰다 보면 속도가 붙는다. 주제만 잡히면 글을 써내려가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질적 문제는 다음 문제다. ‘양 속에 질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나처럼 크로키 속도로 마구잡이로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한테는 그 믿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글을 주제로 글 하나를 쑥 써내려간다.


-얼굴
나이가 들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남들에게 나를 소개할 것이 얼굴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직업, 나이, 성별? 내 가족, 누구의 아들, 누구의 친구? 내세울 것이 사실 명함 말고는 별 게 없다. 누군가에게 이름 석 자와 얼굴만 내밀기에도 뭔가 허전하고, 김영란법 시행과는 무관하게 비싼 선물을 하기도 좀 부담스럽다. 이럴 때 글은 도움이 된다. 어떨 땐 내 글이 나보다 나를 더 잘 보여준다. 내 얼굴 뒤에 자리한 또 다른 나를 꺼내준다. 이렇게 써내려간 글들은 모두 내 안의 내 얼굴이다. 그렇다, 나는 오늘도 내 얼굴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묘비
누군가의 묘비명이 회자될 때에도 딱히 내 묘비명에 무엇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기나긴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기가 너무나 어렵다. 시 한 편과는 비교되지 않는다. 어떤 문장을 남기기로 하면 다른 문장을 왜 남기지 않았나 묘비 안에서 후회막심일 수도 있다. 죽어서는 후회를 되돌릴 기회도 없다. 짧게 남길 실력이 없어 장황하게 남기는 방법을 택하련다. 내 손주와 그 손손주가 훗날 할아버지 할할아버지의 책을 보고, 이런 분이었구나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