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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내 어린 시절 설 풍경

할아버지 댁은 집에서 차로 30분 거리였다. 승용차가 없었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가면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서도 비포장 길을 20분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짐을 잔뜩 싸 들고 가는 터라 걸음은 더뎠지만, 마음은 풍요로웠다.



마을 한가운데 있었던 큰할머니댁이 어린아이들의 아지트였다. 7~8명의 아이는 명절 때마다 큰할머니댁 넓은 마당에서 술래잡기, 숨바꼭질했다. 눈이 온 날이면 비닐 포대를 들고, 동네 산 초입에 올랐던 기억도 있다. 저녁엔 사랑방에서 이불을 둘러싸고 온갖 놀이를 했다. 그때 빙 둘러앉아 했던 전기놀이는 지금도 생생하다. 개중에 나이가 몇 살 많은 사촌 형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던 아이들의 표정은 돌아보면 꽤나 진지했다.


설 전날엔 마을회관 앞마당에서 소잡이를 하는 것도 봤다. 경운기에 매달려온 소가 난도질을 당하고, 그걸 즉석에서 판매하는 인부들, 그걸 똥그래진 눈으로 지켜보는 아이들. 그때 소가 내비친 눈물. 시대가 변해 요즘은 그런 광경을 시골에서도 보기 어렵다.


설 당일에 제사를 지낼 땐 큰할머니댁 한옥 일자형 마루에 나란히 섰다. 서열이 분명했다. 여자는 끼워주지 않았다. 남자 중에선 젤 어린 축이었던 내 자리는 횡대의 가장 오른편 맨 끝자리였다. 아지트가 사라진 건 큰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였다. 돌아가시고 난 뒤 한두 해까진 모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큰집 식구들 사이에선 명절을 굳이 시골에 와서 지낼 필요가 있느냐는 현실론이 대두했다. 어르신들도 이제 없는데 도심에서 편리하게 명절을 나자는 것이다. 결국, 그리 됐다. 하루 이틀 자고 가던 일도 뜸해졌고, 설 당일 잠깐 얼굴 보며 안부를 묻는 정도가 됐다.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도 밤을 지새우다 보면 정이 들지만, 당일치기로 인사치레 정도만 하니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더라. 큰집에 모이던 대가족의 풍경을 지금은 볼 수 없다. 시골에 있던 큰집도 결국 수해 전 팔려 현대식 주택이 들어섰다.


이제는 고향에 내려가면 할아버지 댁에서만 시간을 보낸다. 내 아이들의 유년 설 추억은 어떻게 기억될까. 대가족이 모여 떠들썩하고, 또래 친척들과 사랑방에서 잔뜩 어울려 노는 기억을 남겨주지 못하는 게 좀 아쉽다. 충격적인 소잡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