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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부뚜막아궁이에 타는 장작

어린 시절, 명절 때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면 가마솥이 있는 부뚜막 앞은 내 차지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낌새가 보이면 냉큼 달려가 할머니 옆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할머니가 볏짚에 살짝 불을 붙여, 아궁이 안에 소담하게 쌓아 놓은 마른 잔가지를 쓱 들어 그 밑에다 쑤셔 넣으면 그 뒤부턴 내 차지였다. 잔가지들의 궁둥짝을 방귀 뀌듯 슬며시 들어 불붙은 볏짚을 들이밀면 나뭇가지들은 이내 ‘타다다닥’ 소리를 내며 불이 확 붙는다. 여기까진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만 제대로 된 뭉툭한 장작 몇 개를 집어넣을 때부턴 제대로 감상 모드로 접어들 수 있다. 내 팔뚝만 한 장작들은 아궁이 안을 가득 채우고 끈기 있게 타들어 간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타는 불 색깔은 빨강도 아니고, 노랑도 아닌 이글이글함이다. 이글대면서 타는 불은 모든 것을 빨아들일 기세다. 1000도에 육박하는 불 앞에서 36.5도쯤의 한 인간은 숙연해진다. 얼굴에 닿는 뜨끈한 열기!

장작은 다 탄 뒤에도 감동이다. 하얗게 불태운다는 의미는 땔감을 때워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허리케인 조의 ‘하얗게 불태웠어. 새하얗게’라는 대사도 아마 그렇게 탄생한 게 아닐까. 하얗게 불태운다는 것의 의미란.


설 하루 전날인 오늘, 할아버지 댁에 갔다. 본채는 현대식으로 바뀌었지만, 사랑방 한구석만큼은 아직 부뚜막아궁이가 남아 있다. 오늘도 땔감을 때웠다. 가족들이 모여 솥뚜껑을 뒤집었다. 오리고기가 지글거렸다. 오늘은 유독 하얗게 불태우는 장작보다 지글거리는 고기조각에 더 마음이 갔다. 하얗게 불태우려던 젊은 날의 열정이 식어서인가. 세상의 이치에 너무 길들어진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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