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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전화기

지금은 남녀노소 누구나 휴대폰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지만, 집 전화와 공중전화가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내 아주 어린 시절
우리 옆집엔 40대 부부가 살았다. 무슨 기구한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나이를 먹도록 단칸방에 살 정도로 형편이 됨직하지 않았다.
아저씨가 일을 찾아 몇 달씩 지방에 가 있을 때면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으로 전화가 걸려 온다. 아저씨였다. 변변찮은 살림에 집 전화가 없던 터.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얼른 옆집으로 달려가 아주머니를 부른다.
"아저씨 전화 왔어요"
느긋하게 부를 시간이 없었다. 시외전화로 걸려온 공중전화, 요금이 초 단위에 따라 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숨에 달려온 아주머니, 일주일 동안 온갖 일들이 있었겠지만 간단한 안부와 몇몇 대화들이 오가고는 이내 전화가 끊겼다. 저녁 시간 염치 불구 전화를 빌려 받는 미안함 때문인지,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 말문을 쉽게 이어가기 힘든 탓인지, 생활고에 짓눌려 안부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던 탓인지 이유는 하나로만 규정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전화를 마친 아주머니는 내심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오랜만에 남편의 목소리를 들어서인지 환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집으로 건너갔다. 그러고선 몇 달 안 돼 무슨 사정이 생겼는지 그 부부는 또 이사를 했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면서 같은 빌라에 사는 이웃과 마주쳤다. 한 번쯤 마주쳤던 것도 갔고, 처음 보는 것도 같고.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고는 곧 눈길을 피했다. 요즘 같은 시대 전화기가 없는 집도 만무하겠지만, 만약 내 어린 시절처럼 누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면 자기 집을 선뜻 개방하면서 단란한 저녁 시간 침입자를 허락하는 수고와 배려를 할 수 있는 이웃이 얼마나 될까. 그러기는커녕 층간소음이다 주차 시비다 뭐다, 칼부림에 소송전까지 뉴스에는 온갖 좋지 않은 소식들이 들려오는 요즘이다.
오늘 아침 우연히 마주쳐 당황했더라도 "몇 호에 사는 사람입니다"라며 간단한 소개라도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라도 건넬걸. 종일 아침에 있었던 어정쩡한 내 모습이 아쉬움으로 잔상에 남아 있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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