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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수필인듯 에세이

카톡이 앗아간 삶의 여백

부장급 회의 직전, 실무진들의 손과 발이 가장 분주하다. 촉박한 시간 어떻게든 완성된 회의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기 위한 사투. 하지만 이 전투 이후 찾아올 한시적 여유에 대한 기대감은 피를 말리는 시간을 버티는 힘이 된다. 부장급이 사지로 끌려가듯 회의장에 들어가면 적어도 문이 다시 열리기 전까진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왔었다. 실무진들은 노곤한 몸을 잠시 의자에 기대며 눈을 붙이기도 하고, 커피 한잔의 여유나 간밤에 챙겨보지 못한 기사도 둘러보는 숨 고르는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1차 회의가 끝나면 산더미 같은 윗선과 그 윗선의 지시사항들이 한데 엉켜 쏟아져나오곤 하지만 어쨌든 그때까진 ‘여백의 미’라는 것이 존재했었다.

 

 

언젠가부터 이런 금단의 시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윗선의 편의에 따라 무분별하게 만들어진 온갖 카톡방에서 ‘00 씨, 00 건은 자료가 있는 건가?’ ‘확인되나’ ‘이 내용 좀 찾아서 올려줘’ 실시간으로 지시사항이 전달된다. 잠시 기다려도 반응이 없으면 ‘00 씨, 00한테 연락해서 카톡 확인하라고 하세요’. 남의 카톡까지 챙기는 판이다. 확인하면 하는 대로,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매여 있다. 도망갈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회의장의 긴장감과 피 마름은 카톡 전자파를 타고 고스란히 여백의 현장에 침투한다. 여백은 여백으로 남겨놓을 때 가장 아름답다고 동양화는 말하고 있지만, 언젠가부터 흰 배경도 흰색 물감을 선명하게 칠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시대가 된 듯하다.

 

성과는 사실 별반 차이가 없다. 이때나 저 때나, 회의 때 실시간으로 확인할 때나 회의 끝나고 차례대로 확인할 때나 결과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잠깐의 여유를 취하고 또다시 전투에 임할 때 더 능률이 난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렇다. 물론 수혜자는 있다. 부장급들은 분명 편해졌을 테다. 예전엔 모르는 내용을 상관이 물으면 "확인 후 2차 회의 때 보고드리겠습니다" 이런 민망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민망함에서 얼마간 해방될 수 있다. 타자만 빠르다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즉각 보고할 수 있게 됐다. 회의장에 들어서는 대표자만 총대를 메던 훈훈한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카톡뿐만이 아니다. 에버노트, 드롭박스, Polaris office 등 유용한 프로그램이 정말 많다. 스마트 기기 간 연동이 자유자재다. 편리함이 더해질수록 여백은 사라진다. 능률이 커질수록 일은 더 많아진다. 맡은 분량의 일을 일찍 끝내면 휴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움큼의 일이 더 주어진다. 적어도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일 잘하는 놈 일 하나 더 주자는 분위기다.

 

샐러리맨이라면 이렇게 외쳐야 한다. "빼앗긴 여백에도 월급은 오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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