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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틈새 글쓰기

언어 현실과 국어 규정 사이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전면광고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잊혀지지 않는 첫인상이…’


21일 어느 조간 전면광고 중에서


유독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단어지만 표준어로 인정되지 않는 ‘잊혀지다’는 단어. 광고는 말할 것도 없고 각종 기사에도 ‘잊혀지다’ ‘잊혀진’ ‘잊혀지지’ 등의 형태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언어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에 이 단어의 표준어 인정 여부를 묻는 말이 수시로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은 이 단어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 최근인 지난해 12월 국립국어원 답변에는 

‘잊히다’라는 피동사에 또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어지다’를 붙인 ‘잊혀지다’는 어법에 맞지 않은 표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해 5월에는 나름의 고민이 묻어 나온 답변을 찾아볼 수 있다.

국립국어원은 이익섭(전 국립국어원 원장) 서울대 명예교수의 ‘국어문법론강의’에 나타난 연구를 소개했다. 이 명예교수는 "‘~어지다’를 잘못 사용한 경우들인데 그러면서도 ‘잊혀진 일’ 등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며 "사태를 좀 더 지켜보며 무엇이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지 그 원인을 캐 보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99년인데 16년이 지난 지금 ‘잊혀지다’는 단어가 더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어디에서라도 추가 연구가 이뤄졌는지 모르겠다.


이 단어는 국립국어원도 관용어 사전에서 오류를 범할 정도다.

국립국어원 관용어 사전에 

‘기억에서 사라지다 : 머리에 기억되었던 것이 잊혀지다’라고 표기했다가 아래와 같은 지적을 받자 수정했다.

네티즌이 국립국어원에 관용어 사전에 나온 문제점 지적한 내용


위 지적에 대한 국립국어원 답변. '잊혀지다'를 '잊히다'로 수정


언어 현실을 반영해 표준어를 확대하는 추세는 분명하다. 같은 뜻으로 많이 쓰이는 말이 있어 이를 복수 표준어로 인정하거나, 어감 차이가 나서 별도 표준어를 인정하는 것, 다른 표기 형태를 인정하는 것 등이 대부분이다. 짜장면, 택견, 품새, 삐지다, 꼬시다, 딴지, 사그라들다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처럼 국어 원칙에 어긋나는 단어는 표준어로 인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럴 때, 문법에 가로막힌다면 이 단어를 ‘관용어’로 판단해 표준어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문법 예외 조항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많이 쓰이는 관용어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단어의 뜻을 다르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표준어인 ‘잊힌 일’과 비표준어인 ‘잊혀진 일’ 뭔가 좀 의미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나. 잊는 것이라는 의미상 왠지 모르게 피동을 재차 강조한 표현이 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무분별하게 표준어를 인정하는 것은 잘못됐지만, 국어를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표준어 취지라면 이 단어만큼은 수용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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